운명의 1950년 6월 25일 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즉시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을 꺽으려고 남의 나라 외교관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초 대사는 대통령이 적군의 수도 함락을 사수하다 군대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적군에 잡히지 않을 그 순간까지 머물러 있어 달라고 호소했다.
끝내 설득은 실패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달랑 4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객차 2량만 달린 낡은 3등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가다보니 대구다.
"어~ 너무 내려갔다. 대전으로 돌려라"
대전에 도착한 대통령은 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인다.
녹음방송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서울에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들 모두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세월호 선장보다 더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6월 27일 서울시민을 속이고 혼자 도망한 것도 모자라 예고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로써 최소 수백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정확한 숫자가 없는 이유 : 아예 정부에서 집계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3개월 후 서울 수복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을 인민군에 협조하거나 부역한 혐의로 색출하여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이랬으니 전국 곳곳에서도 이런 기만적인 피란 금지령과 직장사수 명령이 횡행했다. 경남 진주도 그랬다.
인민군이 진격해오자 진주시장과 진양군수, 경찰서장은 물론 소방서 직원과 신문사 기자들까지 겉으로는 '진주 사수' '결사항전'을 외치며 시민들을 속인 후 은밀히 진주를 탈출해버렸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시민들은 인민군이 시내로 진입하던 31일 새벽에야 피난을 가려 했으나 당시의 유일한 남강다리인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곧이어 군·경은 진주교를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이후 과정도 똑 같았다. 9월 25일 아군의 진주 수복 후 남아 있던 진주의 모든 시민이 부역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그 중 상당수가 처형됐다.
아직도 이런 대통령을 옹호하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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