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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했고, 이 자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면서 경제적인 열매로서 산업화도 이뤄졌다. 산업화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통한 산업화다. 여기에 그 민주화와 창의성을 담보한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엄혹한 군사독재였던 시절, 민주화의 불꽃은 늘 청년들로부터 시작됐다. 청년들이 시대의식을 공유하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끝없는 경쟁과 승자독식으로 청년이 아파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펙 쌓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피로한 세대가 되었다. 이만열 교수는 젊은 청년들에게 시대의식을 가지고 입을 열기를 당부한다.
"젊은이들이 먼저 정의로운 나라와 옳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역사 의식을 통한 시대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문제와 장래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처럼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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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강의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책임이 교회 안에서 친일 잔재청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한국 교회가 친일파청산에서 간과한 것이 무엇인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 여러 변명을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마땅히 '그때 본인들이 인간적으로 나약해서 넘어졌다'고 고백하고, 교회와 교우(敎友)에게 용서를 구한 뒤 자기의 거취를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3개월 동안 설교도 하지 않고 자숙하며, 3개월 후 교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제안했다. 이 정도가 최소한의 제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했다며 자기변명에 열을 올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은 셈이다.
일제 강점기 말, 한국 교회의 친일행위는 신사참배로 집약될 수 있다. 신사참배 후 교회에 가미다나(神棚, かみだな) 같은 신단(神壇)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교회 종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국방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의 타락을 이해하기 전에는 해방 후 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운동을 외쳤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한 사람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겨난 교단이 '고려파'다. 옥에서 나온 성도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 개혁을 외치다 기득권 세력에서 밀려나 세워진 교단이다. 그들이 세운 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다.)
만약 당시 교회가 내부의 친일문제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어떤 효과가 있었겠나. 종교의 영적 힘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우리가 이렇게 친일잔재를 청산했으니 우리 사회도 친일잔재를 청산합시다!"라고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됐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가 예언자로서 친일청산을 외쳤어야 하데, 외칠 영적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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