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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항어르신께]만약 "다산 선생이 유배를 안 가셨다면"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4-04-08 14:38:03
추천수 13
조회수   773

제목

[주항어르신께]만약 "다산 선생이 유배를 안 가셨다면"

글쓴이

이민재 [가입일자 :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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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다산의 3農 哲學과 산업진흥론





일찍이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임금께 드리는 ‘농책(農策)에서 “대저 농(農)이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으로서 때(天時)와 땅(地利)과 사람(人和)의 화합을 기해야 그 힘이 온전하게 되고, 심고 기르는 것이 왕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낳는 것은 하늘이고, 기르는 것은 땅이며, 키우는 것은 사람이다. 이 삼재(三才)의 도(道)가 하나로 모인 다음에야 농사일과 나라사일에 모자람이 없게 된다.…그런데 천하 사람이 차츰 (나랏일의) 근본(本)을 버리고 끝(末)만 도모하니 기름진 논밭과 살찐 흙이 모두 묵히게 되고, 높은 모자, 좋은 옷을 입은 놀고 먹는 사람이 늘어난다.…농사일의 고통스러움을 근심하지 않고서 어찌 왕업의 터전이 굳건하길 바랄 수 있으며, 농민의 고달픔을 어루만지지 못하면서 어찌 모든 백성의 평안함을 기대할 것인가? 차라리 대박대기를 끌며 바다를 건너 이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크게 한탄했다.



불행하게도 다산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입으로만 개화를 부르짖던 구한말의 조정은 계속된 서정(庶政)과 농정(農政)의 실패에 겹쳐 외세의 강압으로 강제 개항(開港)을 당한다. 그리고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지고 외세는 발호했다. 그 결과 마침내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이 땅의 뭇 선남선녀들이 대도시로, 만주대륙으로, 하와이로 한 많은 유랑 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지주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토지개혁론(田論)을 주창한다. 그는 반계의 공전론(公田論)과 성호의 한전법(限田法)을 뛰어 넘어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협동경영’의 원칙에 입각한 여전법(閭田法)을 제안한다. (田論, 다산논총(이익성 역), 을유문화사, 1984, pp.15-29.) 농민이 농민으로 존재하려면 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고히 하되 공동경영(협업)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였다. 농민을 농지의 주인으로 삼는 입민지본(立民之本)은 오로지 농지의 재분배를 통해서 세울 수 있다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펴는 등 다산의 농업관은 대단히 원칙적이면서도 오늘날에도 그 시사성과 실천성이 뛰어나다.



원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농업의 道(農策, 전게서, pp.161-166.)를 일군다라는 사상은 오늘날 현대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친환경적 친자연적 농업관을 피력한 것이다. 특히 농업은 태생적으로 세 가지 불리점(不利点)이 있는 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농업, 농촌, 농민살리기 3농(三農)정책(応旨論農政疏, 전게서, pp.225-248.)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는, 대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厚農)”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 둘째는, 농업이란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기계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便農)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그 셋째는, 일반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上農)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만일 농업 농민을 이처럼 우대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 막대기를 벗 삼아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토로할 만큼 농업․농촌문제를 나라와 겨레 발전의 필수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관료와 토착세력들의 수탈을 고발한 “애절양(哀絶陽)”이나 “기민시(飢民詩)”와 같은 수많은 시문을 통해 사회정의 확립과 민생의 바른 길을 깨우쳐 준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다산은 또한 상업(商業)을 발전시켜 생산과 부(소득)를 늘리되, 특권을 갖는 상업이라든지 매점매석은 억제하고 중소생산자와 소상인은 보호해야 한다는 현대적 상업관(商業観)을 주창하였다. 즉 정부는 도매(市廛) 상인들의 과도한 독점권(禁乱廛権) 행사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통공(通共)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조대왕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건의하고 국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채택한 “신해통공(辛亥通共)” 개혁정책에 茶山의 기여가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정조실록)



세도정치나 특정권력에 기생하거나 지방 토호세력 및 아전세력들과 결탁한 늑매(勒買, 강제로 사게 하는 행위)와 호상활매(豪商猾売, 특권적인 매점매석 행위)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지금도 대형 다국적 유통회사들의 횡포에 대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그 외에도 그가 주장하고 일부 실천한 바 있는 과학기술개발론(科学技術開発論) 이라든지 광산국영론(鉱山国営論), 조세 및 화폐제도 개선론 등은 지금도 가히 경청해야 할 탁견이라 할 만큼 당시의 사회경제 여건에 비추어 아주 빼어나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경제부문 이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의 고등(행정, 사법)고시, 즉 과거제도(科挙制度)의 폐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거부와 민족주체의식의 강조, 신분․당파․지방 차별제도의 타파와 공평하고 공정한 인재등용 (通塞議, 전게서, pp.216-221.), 오늘날의 향토방위체제에 해당하는 민보의(民堡議) 제창 등, 행정 및 정치․사회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양반(両班)이 되면 군포(軍布)도 안내고 이른바 놀고먹을 수 있는 썩은 제도, 문벌주의, 지방차별, 적서(嫡庶)의 차별, 당파 차별 등 각종 차별정책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뭐니 해도, 다산이 되풀이하여 강조한 분야는 현대적 의미의 부정부패(不正腐敗) 비리척결론이다.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횡포를 척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미래도, 백성들의 편안함도, 부국강병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부단히 그 대안을 찾아 개혁정책의 전파에 노심초사한 것이다.



(후략)



※ 출처: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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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lenteur@hotmail.com 2014-04-08 14:39:25
답글

일전에 주항 어르신께서 "다산 선생이 유배를 안 가셨다면" 질문을 하셨는데 궁금증에 해소는 안 되시겠지만 그래도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참조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br />
<br />
http://board.wassada.com/iboard.asp?code=free_pds&mode=view&num=149206&page=0&view=n&qtype=user_name&qtext=이민재&part=board

soni800@naver.com 2014-04-08 16:46:19
답글

귀향을 안 갔다면 사약 보냈겠죠,<br />
우리 역사에 저런 분들 어디 그냥 놔 두던가요??<br />
그나마 그 덕?에 방대한 서적들을 남겼다고..

황준승 2014-04-08 17:51:27
답글

우리 역사 뿐만 아니겠죠.<br />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 그렇게 했을겁니다

leeinsung@gmail.com 2014-04-08 18:47:54
답글

유배를 안가셨더라면, 숙청되셨을겁니다.... =3=3=3

김주항 2014-04-08 20:34:50
답글

와우.....싸랑하는 민재 슨상님<br />
<br />
지나는 길에 느낌을 말한건데<br />
아즉까지 잊지 않쿠 기시다뉘.....^.^!! (감솨)

김영석 2014-04-08 20:45:17
답글

지금이라면 종북 좌빨.....<br />
<br />

이성위 2014-04-08 22:01:06
답글

군왕(순조)의어명인데 유배를 거부할순없는거고..골수정치인 이었다면 유배후에라도 사사될확률이 높았겠지만 학자로서의 면모가 더했던 터에 그의 인물됨에학식을 익히아는 노론이긴하나 심환지의 입김도 있지않았을까...하는 개인적사견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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