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교원대신문>의 시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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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모든 중요한 것들은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인간의 참된 역사를 조금도 모른다.
--셀린
지난 1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황금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폐지를 줍고 난방을 줄이고 끼니를 걸러 가며 곤궁한 삶을 살면서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학생들을 돕겠다고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증하신 분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바라며 수요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할머니들의 숫자마저 올겨울부터 격감하고 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반복한다.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거이다. 그러나 그토록 인륜에 반하는 일을 저질러놓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정부가 있을까? 히틀러의 정부인들 인종 청소의 기록을 남겨두었을까? 가해자들이 남긴 그들의 ‘공식’ 기록과 아직도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한 한 맺힌 삶 중에서 어떤 것이 실체적 역사에 가까울까? 목소리조차 남기지 못해 침묵 속으로 사라진 그분들이야말로 역사 자체이며, 그 앞에 우리는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녔다고 서술하여 또 다시 인격 살인을 저지른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집필자들은 그 채택이 실질적으로 저지된 뒤 마치 그것이 좌파의 집단 광기의 결과인 것으로 매도한다. 더욱이 그 선봉에 한국교원대학교의 총장이 있다는 사실이 한없는 부끄러움에 빠지게 만든다. 과연 좌파의 집단 광기가 그렇게 기승을 부리는 나라라면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에게 표를 몰아준 사람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 교과서의 채택이 저지된 것은 집단 광기가 아닌 집단 지성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과서 저자를 포함한 역사가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결과이다.
역사가들이 알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가설일 뿐임을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가설이라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를 확보해야 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설득력을 얻어야한다는 것이 역사가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 의식이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검정 과정에서도 타 교과서들보다 월등히 많은 수정 사항을 지적당했다는 사실은 그 집필자들이 역사가들의 직업적 윤리 의식을 지켰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 검증은 역사학계 내부의 문제이다. 그 검증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은 역사학계이지 외부 세력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번 사태는 전문성이 결여된 관료와 정치인들이 역사학계 내부의 문제에 개입한 꼴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그들의 기능을 수행할 때 사회적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교육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행위라 함은 늘 자신의 학문적 활동이 개인적 편견과 우리 공동체 내부의 특정 집단의 부분적 이해를 반영한 결과라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공동체의 타 구성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저자들은 역사가가 지녀야 할 직업적 윤리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가로서 그들의 작업에 대한 학계 내부의 비판도 거부하고, 공동체 전체가 아닌 특정 부분의 가치만을 선전하는 데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편향된 가치관으로 할머니들에 대한 인격살인과 독도 영유권에 대한 망언을 일삼은 일본의 우익 세력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뉴라이트’의 가치를 표방하는 글에 한국교원대학교 총장의 직함을 걸지 말아달라는 충정어린 고언을 도외시하고 총장은 또 다시 그 직함으로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들을 두둔하는 글을 공표했다.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논지를 펼치며 “취향이 다양한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로서, 다양성을 퇴색시켰다고 비판한 글이었다. 그러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적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한 맺힌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도록 만든 거대한 세력에 기대어 이익을 취하려는 그 ‘취향’은 존중받을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릴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진정 ‘다양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각국의 역사학계에서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총장에겐 가닿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많은 학자들은 그 공정함을 명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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