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ted Link: http://m.todayhumor.co.kr/view.php
퍼온 글...
라면의 붕당정치...
해안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부식이 나왔다. 보통 점심때는 빵이나 과자가 나왔고 저녁때는 라면이 주로 나왔다.
점심에는 인원수에 맞춰 개인적으로 부식을 지급했고 저녁때 나오는 라면은 근무를 마치고 나서나 근무 전에 다 같이
모여서 먹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라면은 컵라면이 나왔는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컵라면이 나와도 따로 물을 부어
먹는게 아니라 다 같이 취사장에 모여서 냄비에 끓여먹었다는 점이다.
그 날도 근무가 끝나고 다같이 취사장에 모여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한참 라면을 먹다 문득 한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컵라면을 냄비에 다같이 넣고 끓여먹을 필요가 있을까? 사실 이등병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점이었지만 그 시절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라면을 약간 덜 익혀 먹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컵라면 같은 경우는 면이 얇은 경우가 많아 냄비에 넣고 끓이면 먹을때쯤 되면 면이 다 불어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짬도 먹을만큼 먹었고 위보단 아래가 많아진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일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것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컵라면을 굳이 냄비에 끓여먹을 필요가 있냐는 나의 말에 제법 많은 인원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나의 말 한마디에 평화롭던 취사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 해졌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한꺼번에
냄비에 넣고 끓여먹어야 한다는 동인과 아니다 컵라면이 괜히 컵라면이겠느냐 그냥 물을 부어 먹는게 맞다 라는 서인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다 그들 내부에서도 그렇다면 약간 덜익혀 꼬들꼬들하게
먹자는 남인들의 등장과 아니다 라면은 푹 익혀서 먹어야 한다 라는 북인으로 나누어져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만 갔다.
급기야는 그럼 반은 냄비에 끓이고 반은 부어서 먹자는 탕평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라면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난 그냥 안먹고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겠다는 염세주의자들 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치의 양보도 없는 이 쓸데없는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냄비에 끓여먹기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된 의견은 그동안
먼저 간 고참들이 이룩한 유구한 전통과 관습을 깨버릴 수 없다는 것과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흘러 나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걱정이 되면 이시간에 라면을 먹지말고 담배부터 먼저 끊으라는 반대파의 불만섞인 의견이 터져나왔고
이미 정상적인 토론의 범주를 벗어나 원색적인 비난이 빗발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에 이 논란을 초래한 나에게 냄비파의 수장격이었던 고참이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근무가 끝나면
후임들이 먼저 취사장에 내려와 라면을 끓이고 라면이 완성되면 고참들이 내려와 라면을 먹고 올라가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뼛속까지 사대부였던 그 고참은 다 같이 내려와 라면을 끓이면 그동안 쌓아왔던 후임과 고참들 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라며 지금은 단지 라면이지만 이 라면으로 인해 혁명의 불씨는 들불처럼 번져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결국엔 이등병이 혼자 PX에 가는 그런 세상이 올거라며 나를 위험한 사상을 가진 반동분자로 내몰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의견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인원들이 일이등병 들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생각까지 하지도 않았고 단지 내 개인적인
취향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 뿐이었지만 이미 일이등병들에게 나는 후임들의 권익보호와 자유를 위해 앞장서 투쟁하는
혁명의 지도자 면다르크, 면게바라, 면코너가 되어있었다. 그 고참은 당장이라도 나를 화형시키고 싶어하는 기세였다.
하지만 일은 커질대로 커졌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쌍팔년도 마인드를
가지고 군생활을 하냐며 이제는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쉽사리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의미없는 소모전을 반복하다 그렇다면 막내에게 결정권을 주자고 말했고 고참은 좋다고 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고참의 말에 막내는 맞습니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고참을 뒤로 한 채 나는 내 의견을 전달했고
내 말에도 후임은 맞습니다를 연발했다. 사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얘기할 후임은 없었을 것이다. 줏대없는
막내의 말에 뚜껑이 열려버린 고참은 이 황희정승같은 새끼야. 너부터 먼저 맞자며 달려들었고 결국 우리는 합의점을 찾아 낼
수 없었다. 이 논쟁은 한참을 지속되다 부대 안에 정수기가 들어오면서 일단락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