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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17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60% 가까이가 노비였고
18세기까지만 해도 40% 정도가 노비였다.
한 집에 수백명의 노비를 두었던 집도 적지 않았는데
신사임당의 친정에만 노비가 162명 었었다고 한다.
신사임당
퇴계 이황의 경우는
손자들에게 나눠줬던 노비들 수만 367명에 달했다.
이황
그런가하면 유성룡의 집안도
임진왜란에 기근과 돌림병까지 덮여서
많은 노비들이 죽고 뿔뿔이 흩어졌다는데도, 146명의 노비가 있었다.
유성룡
고로 노비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들은 그토록 허례허식을 채워가며
고상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 계집종에게 수치심이란 사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내 종은 머리에 두건을 동여매고
계집 종은 종아리를 드러내고 산다고 표현하는데,
지금에야 여인들의 늘씬한 각선미는
섹시한 미모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지만
전통시대만 하더라도
여자의 맨다리는 궂은 일을 한다는 뜻과
천하다는 뜻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종 때 명나라 사신은
"조선의 계집종들은 종아리를 내놓고 다닌다."
라고 비꼬았고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도 고생만 하는 아내를 두고
정지용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벗은 아내'
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벗은 발은 성(sex)을 상징했다.
그래서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에서는
피아노의 다리도 음탕하다고 천을 감싸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기생들에게도
'발 벗기기'는 무서운 벌이었고
종아리를 남에게 보였다가 수치심에
자살하던 사대부가의 규수들도 있었으니
이런 시절에 발과 종아리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계집종은 수치심을 내팽개친,
인간 이하의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저고리가 짧아지는 18세기 이후부터는
평민 아녀자들도 젖가슴을 드러낸 채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보한다.
다만 이는 자식을 낳은 유부녀들의 특권이었다.
● 노비의 분류 : 노비라고 다 같은 노비는 아니었다.
노비는 크게 구분하면
국가기관에 소속된 공노비,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가 있다.
공노비
┌ 내(內)노비 : 왕실 기관에 소속
├ 사(寺)노비 : 중앙 관청에 소속
└ 관(官)노비 : 지방 관아에 소속
사노비
┌ 솔거노비 : 주인 집 호적에 등재된 노비
└ 외거노비 : 주인과 멀리 떨어져 독립되어 살아가는 노비
여기서 외거노비와 솔거노비에 대해서
조금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외거노비들은 솔직히 노비라고 보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중세시대 농노, 일본 장원의 농민들과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인을 위해 일을 하다가
가을걷이 후에 일정량의 쌀, 무명 따위를 바치기만 하면
별로 간섭 받지 않고 살았다.
한편 솔거노비들의 경우는
주인집에서 함께 살던 노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조선시대에 수 많은 노비들을
모두 한 데 데리고 살만큼 큰 집을 가졌던
양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개는 주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사는 솔거노비들이 많았다.
이들의 집이라고 해봐야 방한 칸이 전부였으니
이런 집을 일컬여, 호지집, 가람집 등으로 불렀다.
▲ 호지집
● 죄를 크게 지면, 식구들 모두가 노비가 됐다.
동아시아에서 노비는
애초에 전쟁포로나 범죄자에서 비롯되었다.
경국대전에서도 노비에 관한 조항은,
민법이 아니라, 형법 파트에 올라와 있다.
특히 대역죄를 지으면 조선시대 특유의 연좌죄로
삼족(부계+모계+처계)이 모두 종으로 내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조 때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사육신들은
모두 능지처참(정확히는 거열형) 되어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이중에 박팽년은 국문 중에 죽었음에도
죽은 시신을 가지고 사지를 오등분으로 찢었고
박팽년
그들의 식솔들 중 남자는 모두 교수형을 집행했고,
여자들은 모두 관노비로 내쳐졌는데
이때 박팽년의 며느리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이에 세조는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세조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계집 아이가 태어나면 관노로 내쳐라."
그러자 전전긍긍하던 박팽년의 며느리에게
한 여종이 제안을 했다.
마침 그녀도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만약 아씨가 아들을 낳고
소인이 딸을 낳으면 자식을 바꿉시다."
라고 제안을 하였는데,
진짜로 박팽년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고
여종은 딸을 낳아 자식을 서로 바꾸게 됐다.
그래서 박팽년의 손자 박비는 목숨을 부지하여
대구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후 100여년이 지나
명종 때 대구 부사가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죽은 박비의 아들 박충후를 노비문적에서 빼내어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정에도 알려지게 되어
박충후는 관직까지 제수받게 되었다.
이 드라마틱한 사건의 스토리는
드라마 '마의'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