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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문에서 읽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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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아보니]‘놀부’에겐 징벌이 미덕
하네스 모슬러|서울대 대학원생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미덕을 쉽게 보여주는 설화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교훈이다. 놀부는 흥부의 갑작스러운 부를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금은보화를 얻을 욕심으로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린 후 치료를 해 준다. 놀부는 흥부의 부의 원천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부의 표면적인 발생 과정만 흉내낸다. 다시 말해서 놀부는 어떻게 해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답이 돌아왔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단지 똑같은 결과를 얻는 것에만 집착해서 운을 억지로 초래하려는 것이다.
‘흥부전’의 또 다른 화두는 관용이다. 흥부는 놀부의 악행을 분명히 알고도 형의 불쌍한 처지를 고려해서 자기 집에서 행복하게 살게까지 해준다. 즉, 흥부의 미덕은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사회에도 좋은 일이 된다는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독일설화는 선인(善人)에 대한 교훈은 비슷해도, 악인(惡人)에 대한 결말의 성격이 달라 교훈의 함의도 다르다. 예컨대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보면 두 아이를 잡아먹으려 했던 마녀는 ‘벌로’ 결국 비참한 소사(燒死)를 당하게 되고, ‘아쉔푸텔’(신데렐라) 설화도 결국 못된 언니들은 비둘기들이 눈알을 쪼아 뽑아버려 평생 맹인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벌’을 받게 된다. 즉, 착한 마음의 사랑, 믿음과 노력만큼 보답을 받을 수 있지만 이것을 부당하게 방해하거나 함부로 그 이익을 훔치려 하면 그에 합당한 엄격한 벌이 당연히 따라온다는 교훈을 분명히 하는 문제의식으로 ‘흥부전’과는 대조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는 두 이야기의 해석은 각 문화권이 예부터 이어온 미덕의 이상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도 엄격한 법이 있고, 독일에서도 관용을 할 줄 안다. 하지만, 현재 사회를 보면 이런 미덕의 이상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를 잘 드러낸다. 물론 독일은 지나치게 많은 법과 규칙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법은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한국을 보면 아연함을 감추지 못할 때가 있다. 예컨대 ‘이제 기본질서를 지킵시다!’라는 현수막을 볼 때 이제서야 기본질서? 그럼 지금까지는 기본조차도 안 되어 있었던 말인가? 그리고 법치는 누가 누구에게 권하는 건가? 최근의 대량 사면은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는 법치주의와 어긋난다는 소리가 들린다. 정부는 사회조화를 위한 관용이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결국 사심이 많아 사익만을 쫓느라 사회에 해까지 끼쳤는데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가볍게나마 형이 확정된 거물까지 대량 사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묻지마 봐주기’도 결코 관용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실질적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놀부전’들은 오히려 ‘아쉔푸텔’의 결말이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눈알을 뽑지 않는다 하더라도 단지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를 위한 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