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눈도 오고 해서...
시국은 하 수상하나 마음이 착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창 밖을 보다가 엊그제 제 공간에 써뒀던 글 하나 그냥 옮겨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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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도 기계를 판매하고 수리하는 일을 오래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가게는 내 놀이터였고 부모님 안계실 때 내가 가게를 보기도 해서 가게의 공구들이나 모터,펌프 같은 기계들...그리고 그거 뜯고 조립하는 것들이 굉장히 익숙했다.
결혼하고 따로 살면서 아버지가 쓰시던 공구가 얼마나 고급 공구들이었는지를 알게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게 정리하면서 집에서 쓸만한 거 몇 개 빼고 공구를 그냥 남한테 주신 걸 뒤늦게 굉장히 아쉬워했다.
아버지는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으셨건 것으로 추정한다. 내 성격에서 추정컨대 게으르고 불성실한 학생이었을 거고 배움에도 크게 뜻이 없으셨던 것 같다. 당시 대학갈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 같았던 것도 같다. 그래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서 기계일을 배웠고 그걸 업으로 삼으셨다.
예전에 아버지 일 할 때 가게에 '뿌레'라는 공구를 자주 쓰셨는데 그건 갈고리 형태로 원형 축에 박힌 걸 뽑아낼 때 쓰는 공구였다. 나도 어렸을 때라 그냥 뿌레라고 알고 있었는데...그게 풀 명칭이 gear puller라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만약 아버지가 뿌레라고 부르던 게 puller 라는 걸 알았다면...그 밖의 정체모를 일본 발음들로 가득했던 공구들이 영단어로 뭐였는지...그 영단어의 뜻이 뭐였는지 알았다면 아버지 인생이나 내 인생이 좀 바뀌었을까? 처음 일을 배울 때 그냥 입에 잘 붙지도 않는 발음과 사물을 연결시켜 외우는 과정은 기계일이 수반하는 힘든 육체 노동 못지 않은 고통은 아니었을까...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쓰는 세탁기에서 냄새가 나서 주말에 세탁기 분해청소를 하려고 필요한 공구가 뭔가 찾아보다가 기어풀러(gear puller) 가 필요하다고 되어있길래 필요한 공구가 집에 다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뿌레 생각이 난거다(도대체 저걸 내가 왜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
이 역시 내 성격으로 미루어 추정컨대...천성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아버지가 그래도 지난 세월 고생스럽게 일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오셨고 새삼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된 것도 그 뿌레 생각이 나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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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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