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언어의 지식에서 빛나는 사람은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
- 어떤 필생(筆生)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이형(異形), 그리고 문체의 은유와 비유 그리고 조어의
지적 폭발
-임마누엘 레비나스
1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왠지 쓸쓸한 온도를 풍기는, 낮은 지형의 뒷산들이 병풍처럼 굽이 보는 가운데, 아파트 단지들의 행렬이 저지대에 드문드문 형성되어 있다. 드높은 곳에서 푸른 빛깔로 유영하는 하늘의 빛깔은, 미적거리는 저온과 함께 휘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한층 그 투명함이 지상으로까지 전달되었다. 내게는 이러한 전경이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바야흐로 가을인 것이다.
버스의 창에는 지긋한 관록을 심어주는 바랜 햇살이 어느 찰나에 비스듬히 투과한다. 희색과 하얀색이 전체적으로 섞여 둔탁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나뉨이, 어떤 반영의 그림자를 그리듯 기내에 쓸쓸한 수채화를 소묘한다. 이러한 인식은 빛바랜 과거의 연상과 같은 것이다. 마치 플라이미드 필름으로 나의 과거사를 찍어, 현상해 널어놓은 갈색 사진을 자조하여 바라보는 듯한.
이런 순간들, 시공이 연계되는 임계점의 연쇄는 알 수 없게 관조하는 초연한 순간들을 의식 안에서 빚어낸다. 풍경과 풍경의 이음새가 형용할 수 없는 정신현상, 이를테면 반추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고 감수성의 떨림이 일정한 이미지로 설계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건 자연적인 현상에 다름없다. 최소한 나의 지각에 있어서는 부지불식간 스스로 그러하다.
이윽고 산 밑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필라멘트들의 노란 행렬이 양쪽에서 가차 없이 다가오며 어둠 속에서 긴장을 형성할 때, 아직까지도 마모되지 않는 시간의 사슬을 알아차린다. 기억과 기억이 이어져 있는 것, 그것은 한 개인의 역사성으로서의 시간성이, 현재로서의 뚜렷한 지적 인식 없이 한없이 흘러가, 꼭 한 가닥 가느다란 희망도 좌절도 없는 초연한 가운데서, 주체할 수 없는 삶의 통시성으로서의(혹은 과정으로서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바를 소급이라고 부르면 소급일 것이다.
전철이 역사(驛社)를 떠나 행군하고 있는 모습이 아랑곳하다. 그러나 버스는 순식간에 그 기계적인 율동을 흘려보내고, 또다시 시골풍광으로 들어간다. 아스팔트의 끝물에 서있는 인공적인 울타리들 안에 펼쳐진 도랑과 석간수(石間水)며, 수맥의 힘을 받은 기다란 수풀이며 이들의 모습을 희 번득거리게 하는 유난한 가을햇빛과 이 주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일상적인 느림 같은 것이 창가에 비친다. 나는 서글프기도 했다가 이내 자신의 삶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나의 청춘을 양주에서 불사른 것과 이곳에서 보낸 지난 칠년이 부질없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문인으로 살아가마고 다짐한지 딱 그만큼이 흘렀다. 무진하게 살아온 세월이 덧없는 인생 속으로 미끄러져 청운을 지향하는 것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예도(藝道)의 층위로서 글쓰기에 스며든 대의의 칼날은 더욱 시퍼레졌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진정 감수성의 영역인 것이다. 고결함의 영역은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떻게든 타자로서 뻗어나가지 않고 온전한 동일자로서, 즉 존재자 안에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는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2
지하철에서 드립커피를 무진장 마신다. 앉은 상태에서 아예 입에 갖다 붓는다. 기내의 몇 명이 힐끗힐끗 나를 본다. 직접 ‘멕시코알투라’와 ‘콜롬비아 수프리모’를 반반 배합하여 믹싱한 커피다. 로스팅은 열풍방식으로 약하게 했다. 그리고 60g을 갈아서 4인용 칼리타 도자기 드리퍼에 용지를 깔고 산처럼 채운다. 한 번 물줄기를 돌려서 뜸을 돌리고, 5분 있다가 시계방향으로 계속해서 돌린다. 그중에 휴지(休止)기가 생기면 안 된다. 즉 물을 아주 조금 시계방향으로 중간부터 바깥으로 모든 원두의 면을 돌리되 물줄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예외로 뜸 들일 때만의 휴지가 유효한 것이다.
이윽고 불안과 긴장이 엄습해온다, 팽팽하게. 손아귀에 땀이 약간 흐른다. 내면의 소리를 풀어내지 못 하면 이것은 마치 술이 사람을 잡아먹듯 한 영혼을 삼킨다. 젊음이 여기 있는데 젊음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치열하지 못해서이다. 쉽사리 제문제에 포기를 선언하는 패배주의적 버릇 때문이다. 왜 우울한가? 이는 자신을 속였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구속은 지속적인 불안과 우울, 말하자면 실존적 삶의 결핍, 즉 현전에 대한 패배를 한 아름 안겨준다. 도처에 피상적 기표의 환각에 취하지 않은 곳이 없고, 대도시들, 오직 생활의, 세속의 기표만을 쫓는 사람들 덕에 내 사유는 현기증에 빠진다. [그들이 영원회귀적 반복의 역사인 현상]의 베일을 걷어 진정한 기의의 차원에서 적나라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마주할 기회가 있을까.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망각하고 기표와 지시체 양자가 하나가 된 지점(현상의 지점)에서 이집트 노예와 마찬가지인 정신생활을 영유하고 있다. 양은 우뚝 서고 반면 음은 축축하게 젖어있는 일련의 섹스기계들,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도무지 기표와 기의의 시차(視差)적 유비를 할 줄 모른다. 미상불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가 없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는 본래와(본원성과) 이의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혈액은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근거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는 습관이고 어디까지가 진리를 구명하는 주체로서의 사유 즉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열정일까? 이를테면 기억과 기억을 귀납적으로 교호하면서 자신을 정립해나가는 것, 이 그릇됨-하나의 착오, 죽치고 앉아서 과거를 끊임없이 회구하는 나쁜 버릇이 정합성에 매개되지 않은 채 자기통일성을 완성하지 못하는바, 즉 현재와 아우르지 않고 다만 과거를 사는데 그친다는 것 따라서 과거에 유리됨, 이는 단지 병적인 슬픔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혹은 영혼적 결락에 가까운 기억에 대한 밑도 끝도 편력에 지나지 않는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의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엇이 있는가? 휠덜린의 말처럼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있을까? 칸트의 말처럼 끝까지 정신에 의지해야 할까? 어디에 진정한 자신감이 있는가, 자기당착과 기만에 빠지지 않는 자명한 빛과 같은 진실한 자신감은 이 삼라만상의 공전 속에서 어느 지점에 귀속되어 있는가?
내 앞에 무엇이 있든 맞서 싸워야 한다. 더 이상의 도피와 같은 겉돌기를 개시해서는 안 된다. 형체가 없는 형이상학적 마수, 형이하학에서 이탈하는 것, 이 마귀의 테크네(손 안에 있음)가 계시하는 Zeitlichkeit(시간성). 이를 잊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또한 개인에게 있어서 물리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환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차이 없음이요, 말하자면 슬럼프를 동반한 무시무시한 매너리즘이자 텅 빈 존재다. 인위가 만든 시간성을 자기를 통해 극복하고, 초월했다고 거만하게 말할 만큼 가차 없는 무식한 당위를 확립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이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를? 자신을 지워버려야 할까? 완전하게, 투명하게, 어떠한 방랑의 기록도 없이…, 아니면 이것을, 내 과거의 총체를 떠안고 언제까지나 지리멸렬한 반정립의 무한에 기생해야 하는가. 어디까지나 종합이라는 탈출구를 보지 못한 채 끊임없는 과거를 반성하는 현재, 이 결락에 웅크려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깊은 우물에 빠진 지 오래 되었고 우물은 막혀 있는 것이다. 구원의 줄은 내려오지 않는다. 이 줄을 내려오게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정신임을 알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물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내 의식이 목도하고 이러한 목도를 내가 의식함이, 요컨대 나의 불행을 지켜보는 의식에 대한 인식을 내가 의식함은 얼마나 불행하고 끔찍한 일인가?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는데.
버스는 이미 도시, 마치 “말테의 수기”에 나왔던 그곳, 번화가에서 잠시 정차해있다. 양주시 광사동이다. 이 신도시는 엄청난 양의 아파트 단지를 보유하고 있다. 고층빌딩들은 상가들을 한아름 안고 있다. 이것들 너무나도 빽빽하여 마치 의정부 시내를 나온 느낌을 준다. 실로 광사동은 양주에서 가장 도회적으로 발달한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외로이 유랑한다. 내게는 애초에 집이 없었다. 내게 다리 붙일 곳은 없다. 다만 머무는 과정으로서의 삶에, “내”가있을 뿐이니까.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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