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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 승만과 파락호 - 김용환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3-08-18 16:55:10
추천수 8
조회수   711

제목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 승만과 파락호 - 김용환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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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주시경, 김두봉, 최현배, 장지연, 지석영, 홍명희, 현진건, 홍범도, 김좌진, 나운규, 손기정, 이상설





이름만 들어도 장장한 이 분들이 모두 대종교 교우였다는 것을 알면 민족의 수난을 이겨가는데 구심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수 있습니다,



나라의 오적을 토벌키로……







"여러 의사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오늘의 일은 대한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요,



우리 2천만 국민의 생사에 관한 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바라건대 결사적인 의지로 이 5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쓸어버리면



우리는 물론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살 수 있으니, ….”





가슴에 불을 뿜고 한말

독립운동의 불을 당긴 나철의 5적 암살계획을 세우고 외친 말입니다.



나철…… 대종교의 창시자로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나철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물꼬를 트자. 관직(승정원)에서 물러나 1904년 유신회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어 나라를 구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05년 오기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나철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

청 세 민족은 친선 동맹을 맺고 서로 주권을 존중하자'는 의견서를 제시하였습니다. 나철은 190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폭탄 상자를 구입하여 매국노들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등을 '을사오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암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철은 그들의 친지의 군자금으로 권총 8자루를 구입하여 박제순과 이완용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암살 계획이 탄로나자, 나철은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오기호와 자수하여 10년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나철은 심리 중이거나 재판 중에 일본경찰이나 군인들이 있으면 재떨이를 던지거나 침을 뱉고 그들이 자리에서 나갈 때까지 묵비권을 쓰는 등 철저히 일본인들을 배격했다고 합니다.



단군할아버지를 민족의 구심점으로……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나철 선생은 민족의식의 구심점이 없으면 민심의 역량 결집이 어렵다고

판단해 국조 단군을 민족정신의 구심으로 내세우는 대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기존의 단군교를 대종교로 통합하여 활발하게 포교하였습니다, 민족의 구심을 단군으로 삼은 것은 백두산에서 은거하던 백발노인(백봉선사)라는 도인이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1908년 일본에서 두일백 선옹과의 만남을 계기로 나철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

정신을 하나로 묶는 우리 고유의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그 길로 귀국하여 대종교를 중광합니다.



선도의 법맥으로 민족정신의 구심으로



선생이 만든 대종교는 민족의식을 회복하고 민족의 성인이 국조 단군이었으며 홍익인간 이화세계

정신이 우리 역사에 숨쉬고 있었기에 선생은 대종교를 창시가 아닌 거듭 빛난다는 의미로 重光이라

고 표현했습니다. 나철 선생은 대종교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독립운동가로 키워 내는 한편 독립 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0여 곳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하는 한 편 항일 구국운동에 주력했습니다. 선생이 중심이 되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가 양성의 산실이었고, 이 학교 출신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주도하였습니다.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자세히 보면, 독립 운동가의 2/3가 대부분 대종교 교우였다는 것은 민족의 구심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며



일제는 대종교의 급속한 교세확장에 당황하여 대종교의 불법화 조치를 내리고, 우리 민족의 항일

정신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나철 선생은 민족의 존망앞에서 큰 해답을 얻기 위해 1916년 8월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깊은 명상과 수행을 하였습니다. 선생은 아직 개벽의 시기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수많은 동포가 고통을 겪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한 몸에 안고 본인의 목숨을 끊어 새로운 시대를 기약했습니다〈삼일신고〉수행법인 조식법 (調息法)을 통해 스스로 호흡을 멈추고 목숨을 끊어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고자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3·1 독립 선언보다 앞선 무오 독립선언은 나철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무오 독립선언은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 같은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본격화를 천명한 것입니다. 대종교 지도층들은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한데 모아 항일독립무장투쟁에 나섰으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입니다.



현대에 재조명하는 나철



실천하는 지식인 홍암 나철 선생은 대종교를 만들어 우리 민족 정신을 드높이는 한편 자긍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의 단군 사상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확인시켜 주고 독립 투쟁 의식을 더욱 북

돋워주었습니다. 또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여 뒤에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내

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중흥과 세상의 밝음을 갈구하는 이런 우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

이 나라와 백성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 가고만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갈등과 폭력에서 화해와 평화의 시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명예와 부귀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정

신은 바로 홍익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민족의 선각자들이 깨우쳤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을 전 인류에게 전파해 전쟁과 갈등을 불식시키고 세계를 조화와 화해의 시대로 전환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작성자 북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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