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라과디아' 공항이 있는데, 뉴욕 시장을 세 번 지낸 라과디아의 이름을 딴 공항입니다.피오렐로 라과디아는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고, 재임 시절의 업적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딴 '라과디아' 공항이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법관이며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판사 시절, 가난한 노인이 남의 가게에서 빵을 훔친 죄에 대한 재판을 맡았고,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판사로 재직하던 1913년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인이 빵 집에서
빵을 훔친 죄로 경찰에게 붙들려 온 사건을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굶는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빵을 훔친 노인, 그가 드디어 법정 피고인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인은 라과디아 판사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설명했고,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 을수 없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연신 눈물을 훌쩍거리는 노인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과디아 판사는 단호했다고 합니다.
“처지는 딱하지만 법에는 예외가 없소. 그러니 벌금 10달러를 내시오.” 라고 하면서 당시에는 꽤 큰 벌금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방청석에서는 인간적으로 사정이 정말로 딱해 판사가 용서해 줄 줄 알았는데, 해도 너무 한다고 여기 저기서 술렁 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아니 이게 왠 일인가요?
판사가 판결을 내리고 나더니 자기 지갑에서 10 달러를 꺼냈고, 그리고는 "그 벌금은 내가 내겠소.
내가 그 벌금을 내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나는 그 동안 좋은 음식을 너무나 많이 먹었습니다. 오늘 이 노인 앞에서 참회하고 그 벌금을 대신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웃 주민이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죄도 우리에게 있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판사는 "이 노인은 이 곳 재판장을 나가면 또 다시 빵을 훔치게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여 방청한 여러분들도 그 동안 좋은 음식을 먹은 댓가로 이 모자에 조금씩이라도 돈을 기부해 주십시요." 라고 했고,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방청객들도 호응해 십시일반 호주머니를 털어 모금을 했으며, 그 모금 액이 무려 47달러 50센트나 되었다고 합니다.
라과디아는 1933~45년 3차례 뉴욕 시장을 역임했고, 이 선행의 소문이 널리 퍼졌고 라과디아는 후에 뉴욕 시장에 당선됐으며, 그가 세 번까지 시장을 연임하면서 뉴욕시는 크게 발전했다고 합니다.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라 횐님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이 이야기를 짚어 보는 것은, 어제 장시간 토론해 봤던 한 보수적 얼쉰의 생각이 혹시 변화되지는 않을지, 그 얼쉰을 닮은 51%의 대한민국 국민은 좀 변화되지는 않을지 해서 올려 봅니다.
여기 횐님들 다 이실겁니다. 논리도 없이 이기적 야욕으로 떠벌이는 그 분 말입니다.
그 분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1. 노동자는 자본주의에서 기생하고 사는 기생충이다.
2. 자본가는 헌신적이고 위대하며, 고로 이건희는 위대하다.
3. 가난한 놈들은 지가 못나서 그런 것이다.
4. 노동자는 좀비이고, 누가 선동하면 무조건 파업을 한다.
5. 복지를 외치는 놈들은 결국 파탄에 이른다.
대충 이정도 생각을 가지신 분이더군요. 일베충인가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아직도 농촌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노인들 다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농촌 촌로이거나, 장사 좀 되는 가게 쥔장 정도 될 것이라고 짐작은 해 봅니다.
이런 분들이 라과디아 판사의 자리에 있었으면 어떤 판결을 했을까 생각합니다.
분명 능력없고 게을러 터져서 가난한 것이고, 일하지 않고 빵이나 훔쳤으니 감옥에 가둬야 한다고 판결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할머니 아들이 불의의 교통사고 갑자기 사망했을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해 어쩔수 없는 곤궁의 길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대한민국 보수 얼쉰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더군요.
심지어 쌍용자동차가 정치-자본간의 논리로 폭력진압되었고, 어쩔 수 없이 해고되어 수년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전전하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 사연을 얘기했더니 무능력한 놈이 지 못나서 죽은걸 어쩌란 말인가? 따위로 폄하하더군요. 그 분은 살기 위해 얼마나 발악을 했을까 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더군요.
아직 우리 사회는 라과디아 판사 같은 분을 맞이하게에 너무도 어리석은 국민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좀 먹고 살만하다고 가난한 이웃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다시 한 번 쳐다 보는 그런 지혜로움을 바라는 것은 아직 요연한 일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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