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광복후 군부내 만주군맥 |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 |
2013-07-15 23:20:42 |
|
|
|
|
제목 |
|
|
광복후 군부내 만주군맥 |
글쓴이 |
|
|
이태봉 [가입일자 : 2004-10-30] |
내용
|
|
◆ 박정희군사독재 파워엘리트의 산실 '만주군맥’
= “1932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한 뒤 세운 만주국은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또는 출세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지요. 박정희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중국 옌벤대 박창욱(79) 명예교수는 만주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환경에서 만주 군맥이 형성됐다. 그 뿌리는 만주군 군관을 양성하던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정식 명칭은 ‘만주군 육군군관학교’)다.
이 학교 출신 중 우수한 조선인 엘리트들은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를 비롯해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만주군 헌병 대위), 백선엽(봉천9기·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 김석범(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등이 대표적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 교의·중령)과 김창룡(관동군 헌병교습소·헌병오장)도 만주 군맥의 일원이다.
해방 후 이들은 모두 귀국해 권력을 향해 ‘돌진’했다. 가장 앞서간 사람은 정일권이다. 그는 일찌감치 육참총장(1950년6월∼51년6월, 54년2월∼56년6월)과 합참의장(56년5월∼57년5월)에 올랐다. 합참의장을 끝으로 예편했지만, 그의 ‘화려한 이력’은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더해졌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63년), 국무총리(64년), 국회의장(73년)을 지냈다.
원용덕과 김창룡도 일찌감치 1공화국에서 군부를 주도했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은 1952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이승만 대통령 집권 연장을 위한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해 군의 정치 개입 선례를 남긴 장본인이다. 특무대장에 올라 권세를 마구 휘둘러 군 내부의 미움을 산 김창룡은 1956년 1월 암살됐다. 배후는 만주 군맥의 일원인 강문봉(신경5기) 2군사령관으로 밝혀졌다. 강문봉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된 뒤 5·16 이후 정치인(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는 김동하(신경1기), 김윤근(신경6기), 박창암(간도특설대 출신) 등 만주 군맥이 참여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일본 육사 동기인 이한림은 1군사령관 시절 5·16에 반대하다 체포돼 강제 예편되는 등 시련을 겪지만 건설부 장관(69년)에 오르며 재기했다.
만주군 출신들은 때론 견제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서로를 도우며 ‘권력 집단’을 형성해갔다. 육사 1중대장이던 박정희가 1948년 11월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돼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구명을 위해 만주 군맥이 움직였다.
1948년 ‘숙군’(군내 좌익세력 제거) 당시 여순반란사건 토벌사령관이던 원용덕과 1연대 정보주임으로 수사 실무자이던 김창룡, 수사를 주도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이 박정희 구명에 나섰다.
결국 박정희는 형(무기징역)집행정지로 풀려나 문관 생활을 하다 6·25발발 5일 뒤 현역에 복귀했다. 백선엽은 1959년 합참의장을 거쳐 1960년 예편한 뒤 교통부 장관(69년) 한국종합화학 사장(71년)을 지냈으며 현재(87세) 국방부 군사편찬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였던 신현준, 김석범은 각각 초대 해병대사령관, 2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