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서예를 한다는 건 몇 번 말씀드렸고, 서예의 세부 분야들 가운데 전각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서예나 동양화를 하면 낙관도장을 찍으니까 저처럼 전각하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사실 작품답게 정성들이고 그에 걸맞는 돈을 받을만한 전각은 별로 새기지 못합니다.
대개 필방을 통해 들어오는 싸구려 업자 주문들을 많이 받지요…
요새 서예 배우는 취미생들은 서예라면 붓글씨 정도로나 생각하는, 인식 수준이 낮은데다, 소비 단가도 낮고,
가르치는 선생들, 용품을 취급하는 필방들도 잇속이나 생각하고 수준들이 낮아서 싸구려가 되어버렸습니다.
안목의 수준도, 소비 수준도 바닥을 기는 동네라 벌어먹고 살기 척박합니다.
제가 업자 전각을 새겨 주는 인사동의 필방 한 군데가 있습니다.
사장은 워낙 평판이 안 좋고, 사모가 대신 나와서 장사를 하는데,
카카오톡에 "평생감사"라고 박아놓은 독실한 개신교인입니다.
이 아줌마가 평소에 하시는 걸 보면, 낙관도장 주문이 들어오면 저한테 전화로
"아 여기 ○○인데요, 낙관할 거 있어요"
- 늘 이걸로 땡입니다.
주문한 손님이 급히 찾아갈 것인지, 며칠 여유가 있는 건지,
주문량이 달랑 하나인지, 수십 개인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이 아줌마는 성격도 급하고, 상세 사항 물을라 치면 뭘 그리 따지냐고 귀찮아하는 사람이라
긴 말도 붙이기 어렵습니다.
저는 인사동에 나가서 새겨주고 오는 경우도 많아서, 그런 경우 하루만에 되는 거지요.
출퇴근할 필요는 없는 직업이지만, 주문하고 다음 날, 심하면 당일에도 찾아가겠다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많아서
(작품에 찍을 낙관도장을 하루만에 새겨가겠다는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늘 대기하고 있어야 되는, 어디 며칠동안 서울을 비우지도 못하는 웃기는 직업입니다.
(명절에 고향 못 내려간 적도 많습니다. 명절 직전에 몇 조, 열몇 조를 턱 맡겨놓고,
명절 직후에 찾아갈테니, 해놓으세요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느냐? 절대 그것도 아니고,
어깨는 빠질 듯 아파서 몸도 빨리 갈 것 같아 늘 걱정입니다.
이 필방 아줌마는 달랑 "낙관할 거 있어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서,
오후나 다음 날, 대뜸 다시 전화해서,
왜 그 날 안 나왔느냐, 오늘 왜 안 나오느냐라는 것입니다.
전화를 받았으면 그 날 나와야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식인 거지요.
자기네가 주는 일 때문에 늘 대기하고 있어야 된다는 식인 거지요.
웬만한 경우라면 손님들은 주문한지 사흘 정도 뒤에 찾아가므로,
저는 이것저것 묶어 인사동에 나가 당일에 새겨주기도 하고, 집에서 새겨다 갖다주기도 하고,
낙관도장 일 말고 개인적인 일들과 묶어 나가거든요.
워낙 참담할 정도의 염가로 해주는 일이라, 교통비마저 아껴야 원가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이 필방은 인사동에서도 대량으로 가격 파괴를 하면서 다른 필방들마저 정당한 가격 인상을 못하게 만드는데,
제가 새기는 낙관도장 역시, 그렇잖아도 필방 낙관도장 값은 10년, 20년 전과 가격이 동일한데,
이 가격 파괴의 선두주자 ○○필방이 그나마도 다른 곳보다 5천원을 싸게 받아서,
(제게 주는 가격은 다른 곳과 동일하지만, 소매가가 다른 곳보다 5천원 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필방 때문에, 가격 인상을 할 수도 없고…
이 곳의 가격이 최저가이므로 인사동의 기준가가 되어버린 거지요.
다른 필방들도, 가격 올려야 된다는 제 말에 동의하면서도, ○○필방 때문에 올릴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합니다.
제가 필방 싸구려 전각을 할 정도의 실력은 아닙니다… 질 좋은 작품급 전각을 신속하게, 김여사, 영감들 같은 사람들 요구에 다 맞춰 새겨주니,
제가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는 하고 있지만, 많은 손님들은 그 질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단돈 5천원이 싼 곳으로 몰린단 말이지요.
○○필방은 제게 한글 낙관만 맡깁니다. 한자 낙관은 일반 인장포 도장을 새기는 중국인에게 맡기는데,
그 중국인이 한글이 안 되므로 한글만 제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 아줌마는 장사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그 중국인의 도장과 제 전각을 구분할 줄도 모르고,
제가 자기 원하는 날에 맞춰주기 어렵다고 그러면(그래봤자 다음 날, 이틀 뒤) 길 건너 도장방에서 새겨오고 마는 그런 까막눈이라,
무슨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줌마가 "낙관할 거 있어요"라고 달랑 한 마디만 해도
저 역시 긴 말 않고 "예"하고 말고, 그 날 내지 다음 날 가서 해주고 오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여기 일을 끊고 싶지만, 가격 파괴 덕에 여기 일이 많이 들어오고,
(한자 낙관보다 한글 낙관이 주문량이 더 적은데도 많이 들어옵니다)
제가 여기 일을 끊는다 쳐도, 그 아줌마는 다른 도장포나 어디 가서든 새겨올 것이며,
서예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전각의 질, 수준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그 필방 일을 끊는다 해도 그 필방은 건재할 것이고, 그 필방의 가격이 계속 인사동의 기준가가 될 것이므로,
거기 일을 끊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저는 보는 거지요.
그런 이 아줌마가 카톡에 "평생감사"라고 박아놓고 있으니,
기가 찬 것입니다…
일반화의 오류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개신교인들은 평생감사, 범사감사 늘 입에 달고 살면서
주님께는 감사와 찬송을 바치면서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은 모르더군요. 도리어 민폐를 끼치지…
제가 그 아줌마한테 감사하다는 공치사 듣고 싶은 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울화가 치밀어서 말이지요…
저도 개신교 신학을 전공했습니다만(보수가 아닌 진보 신학이라 전혀 다른 동네이긴 하지만),
주님께는 늘 감사하면서 사람은 돌아볼 줄 모르는 개신교인들의 사고 작동 원리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신학도로서 연구 과제로 삼아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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