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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님께
HIFI게시판 > 상세보기 | 2008-08-12 09:16:17
추천수 0
조회수   315

제목

송원섭님께

글쓴이

이일환 [가입일자 : 2000-10-26]
내용
제가 왜 엉터리인지 말씀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냥 귀찮아서’ 입니다. 많은 부분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장문의 글이 될터라... 솔직히 귀찮습니다.



하나만 말씀드리죠. 저는 원섭님의 글로 미루어 짐작컨대 원섭님께서는 Sense Data를 번역한 '감각자료'라는 개념도 확실히 모르고 계시거나 혹은 매우 불분명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감각자료는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데이터입니다.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빨간 나무 의자’라고 감각하기까지, 우리의 감각에는 의자라는 모양새,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만한 크기, 빨간 색, 나무 재질이라는 감각자료가 주어집니다.



선척적인 관념이나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 경험주의자들은 이런 감각자료를 지식의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 무엇을 느낀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감각자료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문제는, (물론 글의 이전 내용도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의 일치를 꾀함으로써 감각자료를 유의미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난데없이 질문하시면서부터 제대로 글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원섭님의 다른 표현으로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유의미하고 참”이라고 주장하시면서부터 입니다. 별 문제 없는 듯 보이지만,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의 중요한 과정이 생략되면서 글이 엉터리가 됩니다.



정상적이라면, 그러니까 블테를 시덥잖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펀치를 날리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짜맞춘 것이 아니라면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참이고 유의미하다’라는 말에 앞서, 다른 질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충분한 사유와 논증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외부 대상에 대해서 직접 알지 못하고, 감각자료를 통해서 구성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감각한다는 것, 혹은 내게 주어진 감각자료가 환각이 아니라 외부 대상(혹은 세계)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오감에 주어진 감각자료가 진짜로 외부 대상(혹은 외부 세계)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혹은 반영하는 것이 가능한가)?’ 대충 이런 질문이 먼저이지 않을까요? 이런 여러 질문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다음에야, 감각자료는 감각대상과 일치하는 경우에 참이고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과정 생략하고 밑도 끝도 없이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참이고 유의미하다’ 슬쩍 말씀하시면 다분히 특정한 의도를 가진 속임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미 엉뚱한 비약이라고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요.



게다가 사실 ‘감각대상’이라고 단어도 좀 엄밀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각대상이라는 것은 감각된 대상이라는 의미인데, 감각되었다는 술어에는 이미 감각자료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감각대상이란 자아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이미 자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대상이 아니라 간간히 원섭님 글에서 사용하신 대로 외부대상, 외부세계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그러나 뭐 여기가 학술토론장도 아니니까, 감각대상이라는 말도 뜻은 통하긴 합니다.



암튼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논증 없이 무턱대고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참이고 유의미하다’라고 말해버리면 참 곤란해집니다. 왜냐하면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시키는(일치시킨다는 것은 100% 동일한, 하나로 맞아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방법을 찾지 못하면 자신은 완전히 거짓과 무의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게 되거든요.



근데 제가 알기로는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해볼까요? 내 안으로 들어온, 혹은 나와 관계하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논증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섭님께서 유치하다고 하신 소박한 실재론 정도를 제외하고는 감히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참이고 유의미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소박한 실재론조차 힘이 실린 ‘주장’까지도 아니고 그냥 감각자료와 외부 대상이 일치한다 것을 의심하지 않는 수준이죠.



저는 영미 철학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혹시 여기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영미 철학자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원섭님의 생각이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저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 알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썼으니 하나 더,

원섭님 표현대로 “볼륨의 상이함, 음악의 상이함, 착각, 인지의 오류, 선입견 등 오디오 주관주의자들의 감각자료에 거의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요소들이 제거되고 블라인드 테스트가 진행된다고 합시다. 이게 어떻게 감각자료와 외부대상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떤 의미로 ‘객관화’라는 용어를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감각자료를 청각적인 것으로 제한하는 실험과 감각자료와 외부대상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과는 구별하셔야죠. 하나는 소박한 발견학적인 실험이고, 하나는 철학적, 인식론적인 문제입니다. 블라인드 테스트의 유용성을 주장하시는 것은 좋은데... 너무 오버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서로 다른 앰프에서 나오는 소리의 비교하고 반복해서 들어보고는 그 차이를 구별해내지 못했다, 라는 것이 원섭님의 표현대로 ‘앰프는 소리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일치합니까? 여기서 여러 명이 반복해서 청각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 어떻게 앰프의 차이가 없음이 참이라는 것으로 연결됩니까?

더 나아가서 소리가 차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소리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식입니까? 다른 선입견을 제외하고 오로지 ‘빨간색’이라는 감각자료가 외부 대상으로 상정된 빨간 차에 ‘빨간 색이 있음’이라는 이벤트와 동시에 일어나면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하는 것입니까? 동시에 일어나는 이벤트는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하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하나는 외부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납니까? ‘동시에’ 라는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이 진짜 소박한 실재론에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난 인식입니까?



소박한 실재론이 유치하고 단순하고 순진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은 모두 그렇게 소박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파란 차를 보면 저기 파란 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박한 실재론이 유치해지는 경우는 사유의 영역에서만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참, 확실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유의 영역에서 논의될 때, 소박한 실재론이 유치해지는 것이죠. 앰프 바꾸고 소리 좋아졌다, 나빠졌다,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결코 유치한 것도 아닙니다. 원섭님 말씀처럼 오디오만 일상 생활에서 분리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원섭님이 하신 말씀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철학에 있어서 경험론 이래로 감각자료를 점점 명료한 것으로, 혹은 가장 리얼한 것으로 다룸으로써 감각자료와 외부세계를 연결시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중략)... 당연한 일이지만 저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해결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정말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데도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이 일치해야 참이고 유의미하다’라고 말씀해버리시면 어쩝니까. 물론 어느 유명한 철학자나 과학자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으셨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마천 이래로 아는 것만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입니다. 소화하지 못한채로 힘주어 말씀하신 덕분에 특별한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지 본인만 거짓과 무의미로만 가득한 세계에서 살게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선험적 진리에 빠져서 허우적 대지 않고, 유아론으로 빠지지 않고, 회의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것, 모두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남의 글 읽고 그럴듯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으로 소화된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 않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알고 말하는 것과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 차이입니다.



오디오 주관주의자, 객관주의자 라는 단어 외국에서 그렇게 쓴다구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그렇게 쓴다고 그게 내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누가 그런 말을 썼는지, 유명한 사람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설령 외국에서는 그렇게 쓰더라도 우리는 가능하면 뚜렷하고 분명한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으로 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오디오 주관주의, 객관주의라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내가 무엇을 들어서 달랐다, 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하게 되면 주관적인 판단이 우선인 것이니 오디오 주관주의라 불립니다. 이에 반해 네가 느꼈다는 것이 과연 다른 변수를 제거하고 느낀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게 되면 객관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객관주의라고 불립니다”라는 원섭님의 설명은 지나치게 소박하구요.



하나만 쓰자던 게 길어졌네요. 이런 대답하려고 아침에 일찍 출근한 건 아닌데...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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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님께서 2008-08-07 16:41:56에 쓰신 내용입니다

: 이른바 오디오 주관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살펴볼 때 이 사람들이 소박실재론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식은 매우 단순하다. 외부세계가 존재하며 자신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혹은 존재론이다. 자신이 무엇을 인식하였으니 그 무엇이 외부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상당히 유치한 사고다. 소박실재론으로 번역된 기존의 철학술어가 나이브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이런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단순하고 천진무구한 인식론이 존재한다.

:

: 한 사람이 앰프를 교체하고 소리가 달라짐을 느꼈다. 여기서 곧바로 두 앰프는 인간이 인지 가능한 소리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케이블을 바꾸거나 앰프 위에 나무조각 몇개를 올려놓고도 그렇게 느낀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 그것들은 그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다이렉트하게 결론을 도출한다.

:

: 감각대상 --------------------------------------------- 인식주체

:

: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인식론인 셈인데, 이런 인식론의 틀 안에서 사고하게 되면 이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이 분명 느낀 것이 외부세계에 그대로 구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발만 나아가게 되면 이런 인식의 질곡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다. 자신이 느낀 것을 직접적으로 감각대상과 동일시하지 말고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

: 감각대상 ------------------ 감각자료 ----------------- 인식주체

:

: 자신의 감각자료는 무엇보다 명료한 것이다. 버클리가 말했던 바 실재란 감각됨이라는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무언가를 느꼈다던가 무언가를 인지했다던가 무언가를 인식했다는 것 자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다만 그런 '감각됨'으로써의 감각자료가 감각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

: 칸트 식으로 보자면 감각자료는 인식주체가 가진 인식의 형식을 통해 비춰진 감각대상의 모습이다. 인간의 감성(sensibility)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서만 외부세계가 지각된다는 것이다.

:

: 감각대상 ----인식의 형식---- 감각자료 ---------------- 인식주체

:

: 다시 오디오 주관주의로 돌아와서 생각하자면, 오디오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는 감각자료가 감각대상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둘 사이에는 차이가 발견되지 않으며, 둘을 동일한 것으로 연결시킬 방법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감각자료로서 차이를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대상이 전혀 차이가 없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케이블을 바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케이블이 바뀌어서 소리가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대규모 실험에서도 앰프를 바꾸지 않고 두번 연속으로 들려주었는데도 앰프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확률이 2/3 정도가 된다. 여기서 당연히 감각대상과 감각자료의 불일치를 느껴야 마땅하다. 불일치가 너무도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

: 문제는 이렇다. 감각자료가 존재한다. 그것은 너무도 리얼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그 감각자료가 감각대상과 일치하는지는 확언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스피커를 바꿨다. 그리고 상당한 차이를 분명 느꼈다. 그가 차이를 느꼈다는 것 자체는 무엇보다 명료하며 결코 부정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느꼈음을 스피커를 바꿨다는 감각대상(외부세계)에 그대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의 일치를 꾀함으로써 감각자료를 유의미하게 할 수 있을까?

:

: 철학적으로 보자면 감각자료와 감각대상을 일치시킬 방법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난감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감각자료의 그 움직일 수 없는 실재성에도 불구하고 감각자료가 감각대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어와 같은 막무가내의 상식 옹호도 시대를 등에 업지 않은 이상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결국 객관화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 여기서 감각자료는 '차이를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 감각자료가 '차이가 존재함'이라는 인식대상과 일치한다는 것은 어떻게 객관화될 수 있는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조건들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다. 소음의 정도차, 볼륨의 상이함, 인식주체의 선입견 그리고 인식주체가 가진 오류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다른 조건들이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느낌'이라는 감각자료와 '차이가 존재함'이라는 인식대상이 동일한 이벤트로 성립될 때 감각자료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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