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미국식 자본주의? 글쎄요. ‘자본주의가 정의롭다’거나 ‘미국식 자본주의는 공정한 무한경쟁을 추구한다’는 식의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서 경제초보가 몇 자 적습니다.
자본주의의 태동, 정의 등은 무척 복잡한 이야기가 될 뿐만 아니라 구구절절 떠들 능력이 안 되어 패스합니다. 미국사에 대해서도 무식하긴 매한가지지만 조금만 주절거려 볼게요.
초창기 자본주의의 모습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겁니다. 많이 번다고 세금을 왕창 내진 않았죠. 크게 한탕하면 그게 전부 자기 몫이 되었습니다. 그 대신 사업하다 망하면 파산신고 등으로 빚을 날릴 수도 없었습니다. 사기를 치지 않아도 망하면 경제사범이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업가와 모험가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죠. 초기 자본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선거권도 경제력에 따라 차별받을 정도였죠. 없는 집 아이들은 5~6세면 초기 자본주의의 기초동력이 되는 석탄을 캐기 위해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의 기수, 자본주의의 선두주자 영국에서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마흔을 넘길 수 없었습니다. 순수한 자본주의로는 사회의 연속성이 파괴되고, 사회정의도 사라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양상이 세계대전이죠.
1. 길었던 도금시대
아무튼 미국으로 이야기를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에서 독립된 후 미국은 순수한 자본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되도록 낮은 세금을 유지하고 석유사업가나 금광업자 등이 크게 한탕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의 사람들 삶은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경제상황을 ‘도금시대’라고 합니다. 유럽에선 1880년대에 이미 노령연금, 국민의료보험, 실업연금 등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부자독식이 계속되었습니다. 중산층은 얇았습니다.
‘억만장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버클리대학교의 한 경제사학자는 ‘평균노동자 2만 명의 연간 총소득 이상을 버는 사람’을 억만장자라고 했습니다. 1900년의 미국에는 22명의 억만장자가 있었습니다. 1925년까지 그 숫자가 꾸준히 불어나서 32명까지 늘어났습니다. 1920년대 미국의 소득세는 1%도 되지 않았습니다. 적게 걷으니까 빈민층에 대한 정부 지원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29년 세계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미국도 순수한 자본주의를 포기하게 됩니다.
2. 대압착시대
세계대공황이 벌어진 후 미국은 순수한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케인즈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케인즈주의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주장합니다. 토목공사는 정부 개입의 한 예일 뿐이지 케인즈주의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높은 세금을 걷어 정부가 재분배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야할 겁니다.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미국은 꾸준히 세율을 높입니다. 이에 따라 고소득자와 중산층 사이의 소득격차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를 대압착시대라고 합니다. 높은 세금을 물게 된 고소득자들은 과거보다 20~30% 적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대신 중산층의 소득은 1920년대와 비교해서 두 배 가량 높아집니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 초에 63%, 재선 말기에는 79%까지 올라갔습니다. 프랑스 좌파의 세금 70% 어쩌고 하면서 그럼 나라 망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대압착시대에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기업에 대한 세금도 비슷합니다. 1929년 미국 기업의 평균 연방세는 이익의 14% 미만이었습니다. 기업세는 꾸준히 높아져서 1955년에는 45%에 이릅니다. 1930년대 초반에서 195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기업과 부자는 높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휘청거렸을까요? 1920년대 후반에 미국의 전체 국부의 20%를 차지하던 0.1% 상류층의 재산은 1950년대가 되면 10% 미만으로 줄었습니다. 그 대신 중산층이 두터워졌습니다. 그리고 두터워진 중산층 중심으로 소비가 늘었습니다. (전쟁특수도 물론 큽니다.) 아무튼 미국은 부강해졌습니다.
대압착시대 이후 정부의 강력한 개입, 높은 세금, 부의 재분배 등은 197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압착시대와 다른 점은 과세가 더 늘지 않았다는 정도일 겁니다. 더 늘면... 소득의 100%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야할 테니까요.
3. 레이거노믹스의 대두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보수주의운동이 일어납니다. ‘세금을 낮춰야 나라가 산다’거나 ‘정부의 개입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보수주의운동은 신자유주의, 냉전 이데올로기와 결합합니다. 그리고 레이건의 경제정책이 펼쳐집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집권한 대처와 함께 앵글로색슨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돌입한 겁니다. 기업의 세금,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낮췄습니다. 당연히 부유층의 소득은 증가했습니다. 그 대신 빈부격차는 다시 심화됩니다.
1940~1990년대 미국 100대 대기업 CEO들은 일반 노동자 40명분의 보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레이거노믹스의 지원을 받아 이 비율은 367배로 높아집니다. 2005년 기준으로 스위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일본의 CEO 임금은 각각 미국 CEO의 64%, 55%, 44%, 40%. 25%에 불과합니다. 노동자 평균임금은 미국보다 높은데 말이죠.
4. 신자유주의 전성시대
미국 CEO들이 그렇게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금융상품과 적대적 M&A 덕입니다. 레이건 집권 초기와 후반의 경제상황은 매우 달라집니다. 초기가 실물경제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후기에는 금융이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금융은 각종 파생상품을 만들면서 몸집을 점점 불려나갔습니다. 금융이 (과도하게) 살찌운 분야가 부동산이었죠. 부동산을 포함한 ‘자본’이 과대평가되면서 실물경제와 금융경제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고, 미국 CEO들과 부도덕한 금융업자들은 이 속에서 ‘숫자상의’ 이윤을 창출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결국 풍선이 터졌습니다. 금융 파생상품을 지엽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건 잘못된 주장입니다. 금융파생상품이 무너지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기지론 부실사태 이후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게 되었죠. 그래서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등은 과거의
미국식 자본주의가 뭔지 한 문장으로 정의하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경쟁, 낮은 세금, 정의로운 자본주의 이런 거랑은 거리가 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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