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질문을 받아서 영광입니다.
1. 당연히 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이 아닌 장교급들인 무장의 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유력집안은 불교(선종) 사원에서 쓰기와 읽기부터 시작해서 전략/전술을 배우거나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카가(足利)학교에서 의술까지 배웠습니다.
그 수준은 중국과 조선에 비해 어쩔 수 없이 상당히 기초적인 수준입니다.
2. 전국시대 초중기, 각 나라(영지)가 작고 동원되는 병사 수도 적은 전투에서는 전략/전술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만, 상비군 체제와 조총이 대거 도입된 중기 이후에는 병사들의 무장과 수에 따라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중기에는 무장들의 전설적인 무용담이 많았던 반면에 중후반부터는 무용담이 거의 없이 전투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병력을 집중시키는 시스템을 적용해서 항상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했고 그것을 그대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어받았습니다.
3. 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합니다. 한 해에 생산할 수 있는 쌀의 규모에 따라 병력이 좌우되기 때문에 논과 밭에 대한 투자는 늘 있었고, 그것이 부족한 산악지방에서는 금과 은 광산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총이 사용된 후에는 쌀만큼 금이 중요하게 되었고 거의 모든 다이묘가 상업을 크게 활성화시켰습니다.
인구는 저도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예측성 분석을 하면 전국시대 초반에는 영지가 쉴새없이 바뀌면서 인구가 줄어들었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전국구 깡패라고 할 수 있는 대형 다이묘들이 영지를 통합하면서 본성이 있는 원래의 영지는 전쟁의 피해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농업+상업+공업이 크게 발전했고 인구도 상당히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국시대 중후반 전투에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죠(관동지방) 가문을 토벌하는데 최대 22만 명을 동원했다고 가정하면 일본 현지학자들은 전비로 1조 2,000억원은 투입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도 가신단에서 병력을 투입했는데 1만 명 투입했을 때에 최소한 300억 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경제규모는 조선을 앞섰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외국과의 교역으로 외래작물이 대거 유입되었고 조선침공을 통해서도 기술인력과 선진기술을 동시에 대거 흡수했기 때문에 전국시대 중후반부터는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박전의님께서 2013-03-17 19:03:12에 쓰신 내용입니다
: 세영님...요새...일본 전국시대 이야기..찬찬히...잘 보구 있습니다..
: 솔직이 일본쪽..역사는 그다지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 (솔직이 서구쪽에서 일본 역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나..자료가..시샘도 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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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최근 몇가지 흥미로운 궁금증이..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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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무장보다는 각 개인의..전투원의 역량이나..능력...
: 상당히..평준화 되어 있는 전투 기량을..갖고 있는것 처럼..
: 느껴 지기도 하구요..
: 그리고 지휘관들의 전술적인 의도를 각 개인의
: 전투원들이..어느정도의 이해도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
: 각 다이묘들 산하..신병 훈련소 같은 성격의 기관이 있었을까요..??
:
: 각 전투의 성패가..각 개인의 역량보다는 지휘관들의
: 전술과 전략이..한층더 부각 되는 상황이 아닌가도 하구요...
:
: ..아주 치밀한 장기말을 두는 것처럼..결국엔..병사들의 수나..질보다는
: 지휘관의 수준에..따라 많이 전투 결과가..좌우가 되었는지의..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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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각 다이묘간 전쟁행위가 그 당시 인구 규모와 경제 규모를 정체시켰는지와..아니면 반대로..경제 활성화와..인구 증가에..한 요인이 되었는지도..궁금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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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블로그..성원 합니다..끝까지..계속..달려 주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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