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책을 내지 않고, 워드프로세서로 즉흥적으로 글을 갈겨 써 포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글쟁이란 하루 중 대개 고독 속에 있다. 대부분의 글쟁이(철학이나 문예,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인문학적이거나 종교와 보수 비판적인 객관론적 관념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 등)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세속적 최대양식인 거대한 돈과, 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위치에서 동떨어지고 골방으로 들어간다, 설혹 소수는 결혼과 연예도 하지만, 대부분은 좁은 사회 관계망 아래서 학계와 출판계 혹은 문예계의 친구와 깊게 지내고, 이 인간관계에서 얻는 만족감과 더불어 독신으로 사는 바가, 유럽이든 한국이든 조상들이 해왔던 것이다. 이들은 영감을 받을 때 자신의 몸이 더러 워도 결코 씻지 않는다. 흐름이 깨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글쟁이들은 고통 속에서 글을 쓴다. 역사 이래 이 개념이 바뀐 적이 있었는가? 대다수의 글들은 관념적이고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완전한 논픽션 산문도 인위적인 형식의 기술적 접근이 시도된다. 글쓰기로 말미암아 글쟁이는 자신을 반성하고 회고하고 개진해나갈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존재하고, 글쓰기의 행위는 투사投射와 같은 것이다. 곧 그에게는 삶의 의미이자 정신의 집합이고, 삶 자체이다.
잔잔한 음악을 들어도 그의 마음 안에는 풀리지 않는 불안 같은 게 있다. 이는 글쓰기의 원동력이지만 정상적으로는 고통이다. 쓴다는 것, 이는 단순히 내뱉는 게 아니다. 침이나 말 따위를 내뱉기는 쉽다. 하지만 정성들여 훌륭하게 예술적이고 혹은 학구적인 글을 형식에 맞춰 쓴다는 건 고등의 작업이다. 글을 쓰는 순간 모든 목적론적 의식의 안개는 걷히고, 진실의 빛이 투명하게 내리쬐는 걸 느끼노라면, 그 누구도 그런 개시, 그런 육박함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창조란 정말이지 기묘한 것이다. 자기학대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그 어떤 측면에서도 이에 다가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읽지 않고 쓸 수는 없다. 카페인과 담배는 일종의 자기학대이므로, 다변과 내뱉기로서의 글쓰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커피와 담배를 한다면, 그 필자에 대한, 정신적 깊이의 문제가 연루할 것이다. 그러니까 좀 단순한 가설이지만, 무릇 질료가 모여 형상을 빚어내듯이(여기에서 빚어내는 행위자는 글쟁이라는 한 명의 존재자일 것이다), 글쓰기에는 임의의 한계도 있을 수 없고 임의의 정합성도 없다.
그리고 작가, 한 위대한 소설가는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녀의 숨결을 기억하고, 언제나 감동적으로 술회하고 흐느끼기까지 한다. 인간은 굴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엄밀한 철학들이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을 정점에 세우듯이, 작가야말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다. 그래서 진정한 작가는 드문 것이다.
명문대에서 학위를 따거나 박사학위까지 준비하는 자세도, 거기서 얻는 경험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모든 지식인과 문예가는 무엇보다 글쓰기와의 대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 규정하는 ‘독자자적이고 개별적인 행위’, 요컨대 텍스트와의 승부로 말미암아 얻는 종합적인 지해가 거의 당위적인 수준에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글쓰기란 자기동일성에서 시작해서 기호, 언어로 자신의 학구적인 시스템을 반성의 위치에서 대자적인 사유의 호흡을 통해 즉자대자(총체)의 층위까지 개시하는 일련의 정신현상학, 사르트르의 용어를 비꼬아보자면 [집렬체적 타성태]라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비록 언어나 기호의 연산이 하나의 균형을 이루어 논리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갖추면서 텍스트라는 무한한 형식으로써 투사되더라도, 우리는 그 투사를 단순히 신경증의 일종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승화에 가까운 것, 리비도를 좀더 고차원적인 층위로 도약시키는 것, 즉 일종의 변증법적 전환과 같이 그 한계와 엔딩이 없고, 이에 따라 인간정신의 한계도 쉽사리 예단할 수 없거니와, 어찌 보면 인간역사의 줄기찬 과정, 그 피상적인 현실성의 실증주의적 기록까지 망라하는, 그러니까 역사의 가지성과, 그 가지성 안에 숨어있는 인간적 실재의 미시적인 기투까지 연합하여, 무한하고 다양한 이 세계의 종합적 비전을 설명하는 계기(moment)들,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주목하는 글쓰기의 현상학적인 퍼스펙티브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글쓰기의 주제가 일련의 군집체를 이뤄야 한다는 것, 즉 일관성을 가지고 더 깊은 의식지평의 확대를 겸비함과 동시에 대중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양을 갖춰야 한다는 건 지식인으로서는 압박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예술의 창작도 마찬가지다. 만일 글쟁이가 글쓰기에 대한 프로페셔널리즘이 없다면, 그 글은 잡다한 산문이나 운문이 될 것이다. 아니면 그런 구별도 불가능한 엉성한 낙서가 될지도 모른다. 정작 위대한 글은 산문과 운문의 형식적 구별이 불필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피네건의 경야, 혹은 말라르메의 작품의 차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감히 운문과 산문의 규격을 깨는 데 어떤 자격이 있다고 광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문단을 뒤흔들 정도의 소질은 있어야 그런 규격을 규정할 위치의 자격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게 아닐까.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중심화두로 떠오른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 그런데 정말 나 자신에 대해 알까? 사실 난 글쓰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 그런데 정말 글쓰기에 대해 알기는 하는 걸까? 정확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텍쥐베리가 말했지.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완전한 인식과 지각의 단계일까? 어디서부터 왜곡이 이루어지고, 우리 의식은 어디서부터 정확한 세계파악과 자기 파악, 그리고 그 관계망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걸까.
이것으로 이 주제는 끝마치겠다.
美石 박준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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