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엔가 제게 값싼 전각(篆刻) 도장을 하청주는 인사동의 친한 필방 구석에서 도장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들어오더군요. 붓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먹을 적셔 사용한 것인데, 붓이 꼬여 못 쓰겠다, 이거 불량이다라고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님과 필방 사장 형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이윽고 형님이 저를 부르더니 그 붓으로 손님 앞에서 직접 써 봐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붓이 꼬인다니, 초보 티를 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속으로 부글부글 끓던 차에 잘 됐다 싶어 그 손님 앞에서 여러 서체로 척척 써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제가 쓰는 걸 옆에서 보더니, 봐라, 붓이 꼬이지 않느냐라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서예의 획이란 부드러운 붓을 갖고 절도있는 운필법을 구사하면서 때로는 강경, 완고하고 때로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미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짐승의 털로 만든 부드러운 붓을 도구로 다채로운 방향, 각도, 굴곡으로 절도있는 운필을 하려면 붓이 안 꼬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매 순간 꼬이는 붓을 매 순간 풀어주는 게 운필의 능력, 묘인 것입니다.
붓털이 완전히 안 꼬이고 획(선)의 진행 방향과 완전히 일치해도 아주 맹탕인 획이 나옵니다.
붓털이 살짝 꼬이면서 매 순간 풀어주고, 종이의 마찰성, 먹물의 점성,
먹물을 머금은 붓을 빨아들이는 종이의 흡착성 등이 조화하여 필력, 선질이 창출되는 것인데,
이런 초보 손님은 이러한 원리를 터득하지 못했고, 선생도 이런 것을 설명하고 가르치지 않으니,
왜 꼬이냐고 붓 탓을 하며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이 손님이 제가 쓰는 걸 보면서 왜 꼬이냐고 억지를 쓰니,
아니, 뭐가 꼬이냐, 꼬이는 걸 매 순간 풀어주는 게 운필이다, 내가 갖가지 서체로 계속 쓰고 있는데 어디 막히는 데가 있느냐, 내가 붓 잡은지 30년 가까이 된다라고 저도 말하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손님이 또 다른 트집을 잡더군요. 맹물 적셔 쓰지 말고 먹물로 써라,
그래서 먹물로 썼습니다. 여전히 잘 써지거든요. 봐라, 뭐가 문제냐?
그랬더니, 왜 신문지에 쓰냡니다. 화선지에 쓰랍니다.
그래서 화선지에 썼더니, 왜 공장에서 생산한 먹물 부어 쓰냡니다. 직접 벼루에 먹을 갈아 써보랩니다.
사실 붓털이 꼬이는 건 붓털이 종이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그런 거거든요.
점성이 있는 먹물로 화선지에 쓰면 저로서는 더 좋습니다. 더 안 꼬이게 될 테니까요.
이 손님이 되가져온 붓은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초보자들은 정확한 운필이 되지 못하니 붓털에 필력을 넣을 수 없고,
부드러운 붓으로는 붓털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조모나 돼지털을 지나치게 많이 섞은 뻣뻣한 붓과,
가급적 번지지 않는 화선지만을 찾고 있는데, 이 손님도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인 것입니다.
서예의 운필이란, 여러 각도, 꺾이고 굽어들어가는 획을 붓끝의 민감함과 붓털의 유연함을 이용하여 붓털을 탄력있게 잘 접어들어가고 펴가며 진행하는 것인데,
붓털이 뻣뻣하니 오히려 붓끝이 방향 전환을 잘 못 하고 그걸 따라가야 할 붓털도 제대로 접히지 못하게 됩니다.
운필을 정확히 못 하니 붓이 화선지 위에서 헤메고 밍기적대고, 결국 먹이 번질 대로 번져 떡이 되는 것입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걸 참고 계속 정석대로 훈련해야 운필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 손님은, 자기가 사용하는 환경 그대로 붓을 써봐야 자기가 문제삼는 붓털이 꼬이는 불량(?)이 검증될 것 아니냐고 생떼를 쓰던데,
여기까지 오자 저는 붓을 턱 던지고 더 못 쓰겠다고 해 버렸습니다.
아니, 상품의 '불량'이란 보편적인 상황에서 하자가 발생하는 걸 일컫는 것이지,
손님의 특정한 사용 상황, 환경을 그대로 재현해야 된다는 게 보편적인 거냐, 이게 상식적인 소리냐고 따졌더니,
그 손님은 자기 붓과 붓말이를 던지고 나가버리더군요.
저도 그 뒤통수에 대고 "앞으로 이 가게 안 오셔도 됩니다"라고 쏘아붙였고.
(그렇게 할 정도로 그 가게와 친하긴 합니다. 아무튼 저도 성질이 뻗쳤었지요)
이 손님은 자기 억지를 관철시키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경우이긴 합니다만,
도구 탓을 하는 경우가 열(10)이라면, 정말 도구가 문제인 경우도 많겠지만,
그 도구를 제대로 운용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작업에 능숙하거나 최소한 정석대로 할 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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