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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있었던 일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3-02-01 17:43:21
추천수 7
조회수   1,497

제목

수요일에 있었던 일

글쓴이

장준영 [가입일자 : 2004-02-07]
내용
수요일엔가 제게 값싼 전각(篆刻) 도장을 하청주는 인사동의 친한 필방 구석에서 도장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들어오더군요. 붓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먹을 적셔 사용한 것인데, 붓이 꼬여 못 쓰겠다, 이거 불량이다라고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님과 필방 사장 형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이윽고 형님이 저를 부르더니 그 붓으로 손님 앞에서 직접 써 봐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붓이 꼬인다니, 초보 티를 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속으로 부글부글 끓던 차에 잘 됐다 싶어 그 손님 앞에서 여러 서체로 척척 써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제가 쓰는 걸 옆에서 보더니, 봐라, 붓이 꼬이지 않느냐라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서예의 획이란 부드러운 붓을 갖고 절도있는 운필법을 구사하면서 때로는 강경, 완고하고 때로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미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짐승의 털로 만든 부드러운 붓을 도구로 다채로운 방향, 각도, 굴곡으로 절도있는 운필을 하려면 붓이 안 꼬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매 순간 꼬이는 붓을 매 순간 풀어주는 게 운필의 능력, 묘인 것입니다.

붓털이 완전히 안 꼬이고 획(선)의 진행 방향과 완전히 일치해도 아주 맹탕인 획이 나옵니다.

붓털이 살짝 꼬이면서 매 순간 풀어주고, 종이의 마찰성, 먹물의 점성,

먹물을 머금은 붓을 빨아들이는 종이의 흡착성 등이 조화하여 필력, 선질이 창출되는 것인데,

이런 초보 손님은 이러한 원리를 터득하지 못했고, 선생도 이런 것을 설명하고 가르치지 않으니,

왜 꼬이냐고 붓 탓을 하며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이 손님이 제가 쓰는 걸 보면서 왜 꼬이냐고 억지를 쓰니,

아니, 뭐가 꼬이냐, 꼬이는 걸 매 순간 풀어주는 게 운필이다, 내가 갖가지 서체로 계속 쓰고 있는데 어디 막히는 데가 있느냐, 내가 붓 잡은지 30년 가까이 된다라고 저도 말하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손님이 또 다른 트집을 잡더군요. 맹물 적셔 쓰지 말고 먹물로 써라,

그래서 먹물로 썼습니다. 여전히 잘 써지거든요. 봐라, 뭐가 문제냐?

그랬더니, 왜 신문지에 쓰냡니다. 화선지에 쓰랍니다.

그래서 화선지에 썼더니, 왜 공장에서 생산한 먹물 부어 쓰냡니다. 직접 벼루에 먹을 갈아 써보랩니다.



사실 붓털이 꼬이는 건 붓털이 종이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그런 거거든요.

점성이 있는 먹물로 화선지에 쓰면 저로서는 더 좋습니다. 더 안 꼬이게 될 테니까요.

이 손님이 되가져온 붓은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초보자들은 정확한 운필이 되지 못하니 붓털에 필력을 넣을 수 없고,

부드러운 붓으로는 붓털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조모나 돼지털을 지나치게 많이 섞은 뻣뻣한 붓과,

가급적 번지지 않는 화선지만을 찾고 있는데, 이 손님도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인 것입니다.

서예의 운필이란, 여러 각도, 꺾이고 굽어들어가는 획을 붓끝의 민감함과 붓털의 유연함을 이용하여 붓털을 탄력있게 잘 접어들어가고 펴가며 진행하는 것인데,

붓털이 뻣뻣하니 오히려 붓끝이 방향 전환을 잘 못 하고 그걸 따라가야 할 붓털도 제대로 접히지 못하게 됩니다.

운필을 정확히 못 하니 붓이 화선지 위에서 헤메고 밍기적대고, 결국 먹이 번질 대로 번져 떡이 되는 것입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걸 참고 계속 정석대로 훈련해야 운필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 손님은, 자기가 사용하는 환경 그대로 붓을 써봐야 자기가 문제삼는 붓털이 꼬이는 불량(?)이 검증될 것 아니냐고 생떼를 쓰던데,

여기까지 오자 저는 붓을 턱 던지고 더 못 쓰겠다고 해 버렸습니다.

아니, 상품의 '불량'이란 보편적인 상황에서 하자가 발생하는 걸 일컫는 것이지,

손님의 특정한 사용 상황, 환경을 그대로 재현해야 된다는 게 보편적인 거냐, 이게 상식적인 소리냐고 따졌더니,

그 손님은 자기 붓과 붓말이를 던지고 나가버리더군요.

저도 그 뒤통수에 대고 "앞으로 이 가게 안 오셔도 됩니다"라고 쏘아붙였고.

(그렇게 할 정도로 그 가게와 친하긴 합니다. 아무튼 저도 성질이 뻗쳤었지요)



이 손님은 자기 억지를 관철시키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경우이긴 합니다만,

도구 탓을 하는 경우가 열(10)이라면, 정말 도구가 문제인 경우도 많겠지만,

그 도구를 제대로 운용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작업에 능숙하거나 최소한 정석대로 할 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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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식 2013-02-01 17:51:44
답글

별별 진상이 많군요.<br />
준영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내공이 상당하십니다.

장준영 2013-02-01 17:56:19
답글

당치 않은 칭찬이십니다.<br />
서예 실력이 신통한 건 아닙니다.<br />
다만, 무엇이든 이게 왜 이렇게 되는가, 원리, 정곡, 맥락을 간파하는 게 관건이라는 의식을 늘 갖고 있긴 합니다.<br />
본문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배우는 사람도 그런 의식이 없고 선생들도 그런 것 설명 안 하고 안 가르쳐주는 주먹구구이니 전체적인 수준이 낮아지고, 그런 진상들도 언제고 불쑥불쑥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주명철 2013-02-01 17:57:36
답글

"브라우니" 데리고 다니는 가짜 여사님이 아니던가요? <br />
음, 개진상~

황준승 2013-02-01 18:11:02
답글

읽고있는 제가 다 부글거리네요

김정우 2013-02-01 18:16:58
답글

서예 관련 일을 하시는군요. <br />
<br />
어렸을 때 고모 할아버지(아버지 고모의 부군 되시니 멀진 않은데 그다지 가까운 느낌은...) 댁과 가까이 살아 <br />
서예가이신 할아버지 무릎에서 붓 잡고 놀던 기억, 초등학교 때 서예반, 인사동 골목 할아버지 서예당에 끌려 <br />
다니며 글 쓰던 기억 등이 있네요. 먹 향을 무척이나 좋아해 할아버지 글 쓰시는 동안 옆에서 한과 주워 <br />
먹으며 먹 갈아 놓는 일은

장준영 2013-02-01 18:29:08
답글

붓이 꼬이고 그러니 화선지 위에서 번져 떡이 될테고, 마음먹은 대로 안 써지니 울화통이 터졌겠지만,<br />
운전이 잘 안 된다고 차가 불량이다, 무술을 배우는데 초짜 시절에 다치고 얻어터지기만 한다고 선생이 사이비다,<br />
이런 식으로 사고가 작동하는 사람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br />
<br />
김정우님 고모 할아버님께서 서예가이셨군요.<br />
옛날에는 손주, 더 옛날에는 제자나 하인을 시켜 먹을 갈았지만 요

김정우 2013-02-01 18:48:11
답글

<br />
중국 출장 차 들락 거릴때 할아버님 심부름으로, 점지 해 주신 벼루와 붓도 꽤나 많이 날라댔었어요.<br />
출장 가방엔 제 일감 부피 보다는 할아버님 벼루 무게와 붓으로 혹 깨지기라도... 하는 염려에 몇 겹을 둘러 <br />
포장을 해대다보니 가방은 늘 빵빵뺑뺑. 그 당시에도 물류가 참 좋았는데 절대 물류 못태우게 하셨지요.<br />
해병대 장교 출신에 글과 산 좋아 하시고 괄괄 하시고 한 술 통크게 하시는 스타일이

mikegkim@dreamwiz.com 2013-02-01 19:33:15
답글

아 도구는 작자를 잘 만나야 빛을 발하는 것인데.,<br />
T_T<br />
카메라가 나빠서 사진이 엉망이라고 하던 초보진사가 생각이 나는군요.,

황준승 2013-02-01 20:08:19
답글

해봉 정필선 으로 검색했더니 유명한 분이셨군요

최창식 2013-02-02 00:10:25
답글

어린애같은 사람 상대하느라 욕보셨습니다. 꼴에 누가 취미 물으면 고상하게도 서예라고 폼잡겠죠.

정석원 2013-02-06 16:56:15
답글

준영님 평소 글에서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강성이신데, 물 흐르듯 부드러운 필감을 내신다니 상상이 어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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