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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3-01-24 13:21:18
추천수 6
조회수   1,501

제목

위화도 회군

글쓴이

양준영 [가입일자 : ]
내용
이성계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논하면,



최영 장군 집에 아들들과 찾아가 무릅꿇고 선봉에 서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위화도 까지 진군하는데 15일이 걸렸고 다시 개성으로 회군하는데



9일 밖에 않걸렸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여진군 3만명 군과 원나라 군 20만명이 고려 원군을 기디라고



있었다.



남쪽에는 원군 북쪽에는 고려 연합군이 명을 치기로 약속하였으나 회군으로



파기되었다.



이성계가 회군하고 명에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사신을 보냈다.



회군의 명분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명은 남쪽 원에 집중 격파해 패망에 이르게 되었다.



혁명한 고려의 이성계 원군 5만명 지원없이 원나라는 패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을 죽으려고 여러차례 시도하였다.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태조는 이방원이 보이자 활과 살을 달라고 해



그에게 쐈으나 화살은 강 다리 앞에 떨어졌다.



태종은 사병제를 철폐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앙 정부 국가를 실현하였고



세종에 이르러 조선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였다.



고려사 편찬에 마지막 왕은 공민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종묘에는 유일하게 공민왕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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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2013-01-24 13:37:49
답글

종묘에 고려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것은 금시 초문입니다.<br />
<br />
다른곳도 아닌 종묘에 공민왕 위패라니.....ㅎㄷㄷ하군요.<br />
<br />
그리고 북원 여진 고려 연합군이라고 해도 그 당시는 이미 기울어진 판세....

최흥섭 2013-01-24 13:49:11
답글

위화도 회군이 결국은 조선건국으로 이어져 세종같은 성군이 태어날 환경을 조성했다는 측면에서 보면<br />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하네요 <br />
왕조시대에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명분이 있으면 역성혁명이 정당화 될수도 있지요<br />
민주공화정 시대에는 그게 쿠데타로 엄연한 불법이지만..<br />
<br />

yans@naver.com 2013-01-24 13:50:07
답글

우왕은 죽어서 신돈의 아들로 辛씨 성으로.

yans@naver.com 2013-01-24 13:53:09
답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조선을 개국한게 아니라 고려의 왕으로 있다가 천도하고 닫았죠.<br />
역성 혁명에서 개국으로.

yans@naver.com 2013-01-24 13:58:31
답글

왕건의 고려 개국은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로 북진 정벌을 유언으로 남기고. <br />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려로 개명하였으니 사실상 역사적으로도 왕건의 후고려 라고 불려야.

이승태 2013-01-24 14:35:12
답글

당시 고려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요동정벌이 명분이었는데, 과연 5만의 군대로 요동정벌이 가능했을지... <br />
그 5만의 대부분도 정예가 아닌 일반 농민들이나 징발해서 훈련시킨 수준이었을테니까요. 이성계 못지 않게 많은 전투를 치뤄본 최영이 과연 이 정도 수준의 군대로 그 넓은 요동을 공략할 수 있을거라 믿었을까요? <br />
<br />
최영과 권력을 다투던 이성계는 이런 생각 들었을 겁니다 <br />
이 영감이 날 이렇게 죽

이정주 2013-01-24 14:48:28
답글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진짜로 있습니다

박재현 2013-01-24 14:49:51
답글

ㄴ 그렇죠. 이성계.조민수....모든 장수들이 요동 정벌을 꺼려했습니다.<br />
<br />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는걸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br />
<br />
그리고 당시 북경 근처에 서달과 연왕 주체가 거느린 병력이 50만이 넘었어요.<br />
<br />
북원의 패잔병 여진족 고려의 징집된 농민군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이석주 2013-01-24 14:51:31
답글

모든 게 정업을 피할 수는 없슴돠.

이승태 2013-01-24 14:51:35
답글

그리고 위화도 회군으로 &#51922;겨난 고려왕이 우왕이니 조선은 우왕부터는 고려의 정식 왕으로 인정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결국 조선이 생각하는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민왕인 셈이죠. <br />
<br />
이성계는 원래 원나라에 봉사하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곳인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함경도를 관할하던 쌍성총관부 소속 장수(이성계의 고향이 함경도 함흥)였다가 공민왕이 이 지역을 공격할 때 고려

이종근 2013-01-24 15:11:16
답글

역성 혁명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니 우왕, 창왕을 신돈의 자식과 손자로 몰아세운거죠.<br />
역시 그걸 정당화 하려고 공민왕 사당을 모신 것일테고...<br />
<br />
그리고, 살곶이다리 전설은 태종을 정말 죽이려는게 아니라 마지막 분 풀이 내지는 인정의 의미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늙었어도 우리민족 역사상 최고의 명궁의 하나인 이성계가 그걸 못 맞췄을까...<br />

이석주 2013-01-24 15:44:37
답글

종묘의 문을 창엽문이라고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죠.<br />
창자를 파자하면 모두 28획이고 조선왕조는 세자책봉을 받은 "이은"까지 쳐서 28대로 문을 닫는다고 본다면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인지? 또한 엽자는 파자하면 20세대간 왕이 나온다고 볼때 형제간 왕위계승을 빼고나면 조선왕조는 20세대를 이어갔으니 이 또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자세한 내용은 창엽문으로 검색해 보면 읽어볼 수 있어유.<br />
또한, 인조가 청의 홍타이지(청태종)에게

motors70@yahoo.co.kr 2013-01-24 16:29:31
답글

역사는 승자에 전유물이라 100%로 믿을건 못되지만 참고는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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