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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 이분법 논리에 빠져 선거를 낡은 이념 대결로 끌고 가버렸어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수권 세력의 모습을 보이는 데 실패했지요. 상당수 국민은 이미 진보와 보수를 선악 구도로 보지 않아요. 이걸로 충성스러운 지지층은 결집시키지만, '선악 구도'에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들은 떨어져나가요. 그러면 선거 못 이기죠.
● [질문] 텔레비전 찬조연설에서 "선거를 잘할 후보와 대통령을 잘할 후보 중에서 선택해달라"고 하셨지요?
[윤여준] "'박근혜가 안 되는 이유' 말고 '문재인을 찍어야 하는 이유'를 이 찬조연설에서 처음 들었다"라는 감상평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연결돼 있어요. 박근혜 후보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악'이므로 국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니까, 유일한 대안은 야권 단일후보밖에 없으니까, 단일화를 이루고 '독재자의 딸'만 알리면 된다고 본 것 같아요. 왜 문재인인지, '자기 정립'을 소홀히 한 거죠. '뭐에 반대'만으로는 정권 잡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뭐라는 것이 확실히 있어야죠.
● (민주당은 )교조적 진영 논리와 선악 이분법을 벗어나야 하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분열을 증폭시키기보다는 민생으로 경쟁하는 생활정치로 가야 합니다.
● (문재인 전 후보는 )대선은 졌지만 국회의원이잖아요? 현실 정치에서 부대끼며, 그 속에서 성장했으면 해요. 총선, 대선 경선, 단일화 협상, 대선 본선을 1년 만에 거치며 엄청나게 압축 성장을 했지만, 지금부터는 현실 정치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의정활동에서 성과도 내보고. 이건 안철수 전 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우리나라는 정치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왜 외국으로 나가죠? 그것도 이상해.
● [질문] 보수는 두 번 연속 대선에서 이겼습니다. 보수는 2002년 대선 패배 이후로 어떤 준비를 했나요?
[윤여준] 딱히 없었어요(웃음). 이를테면 뉴라이트 같은 움직임은 보수 안에서도 신뢰를 못 받았어요. 혹자는 보수 혁명이라는 말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과장이에요. 혁명한 게 어디 있어. 여전히 성장주의와 산업화 모델의 연장 아니에요? 보수의 승리는, 그냥 진보가 다 갖다 바친 거지 뭐.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서로 편한 거예요. 적대적 공생관계. 상대가 안 변하니까 나도 변할 필요 없이, 상대가 못하면 반사이익을 보는 구조. 이 구조에 안주하다가 공히 '안철수 현상'을 얻어맞은 거죠.
변하지 않는 양대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는 계속 쌓여갑니다. 이 구조가 깨져야 하고, 깨질 수 있다고 봐요. 패배한 야권이 먼저 압력을 받을 것이고, 정치란 상대적인 거여서 야권이 변하면 여권이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어요. 국회에 유력 정당이 4개 정도가 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싶어요. 그러려면 선거제도가 크게 바뀌어야겠죠. 직접민주주의 욕구가 강력하게 분출할 겁니다. 이걸 어떻게 제도적으로 수렴·보완하느냐가 절박한 과제입니다. 이게 안 되면 체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 [질문] 쓰신 책(<대통령의 자격>)을 보니, MB 정부의 가장 큰 문제로 국가의 공공성을 훼손한 것을 꼽으셨더라고요.
[윤여준] 공공성이란 게 결국, 대통령과 정치권과 이런저런 국가기구가 사회의 이해 당사자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냐를 보는 겁니다. 이해 당사자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도 국가기구의 결정은 공정하다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 이 기본 합의가 없어요. 민주화 이후로 서서히 무너지다가 MB 정부가 급격히 무너뜨렸어요. 이 상태로는 국가기구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저쪽 편든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국력을 모을 수가 없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 수가 없어요. 공공성이 무너지면 국가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어떤 통치도 작동하지 않아요. 대통령의 생각과 정책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작동하지 않아요.
[질문] 이를테면 진보 지지층이 선관위와 검찰을 불신하듯이요?
[윤여준] 그렇지요. 이번 대선에서 정치 쇄신이 최대 화두였다고는 하는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공공성의 회복이 핵심 과제거든요. 그런데 대선주자라는 사람들이 셋 다 핵심에는 근처도 안 가고, 정치인 특권 포기, 의석수 줄이기…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보고 싶었는데 아쉽죠.
● [질문] 박근혜 당선자의 공공성에 대한 감각은 어떻게 보시나요?
[윤여준] 비교적 엄격한 공공의식이나 절제된 언행은 분명한 장점이에요. 그런데 이게 근대적·민주적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국가주의적이고 가산제적 태도랄까, 국가 전체를 일종의 가족 재산으로 봐서 나오는 거 아니냐, 이게 과연 민주주의 국가가 요구하는 공공성이 맞느냐. 그게 위험하다는 말을 몇 번 했지요.
박 당선자는 민주화 이후 역대 지도자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키워낸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 밖에서 커서, 정치권에 이식된’ 지도자이지요. 근 20년간 은둔생활을 해서 사회적 맥락도 상당히 약하고, 정치도 입문하자마자 사실상 곧바로 지도자로 추대되었어요. ‘과정이 없는 지도자’라는 것이 취약점입니다. 민주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훈련이 되어 있는지, 통치과정을 보며 평가할 필요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