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호치민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한 것이었다. 조국이 노예 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다. 마른 몸매에 약간 겁먹은 것 같은 베트남인 특유의 큰 눈, 한없이 인자하고도 부드러운 표정 속에 호치민의 에너지가 들어 있었다.
1954년 여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호치민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하노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밀림에서 평소의 옷차림으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호치민.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듀이커가 평전에서 인용한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라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끝내 친근한 ‘호 아저씨’의 이미지를 안고 떠났다.
호치민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라고 주문한 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준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 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개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1930년 2월 3일 이국 땅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결성하던 이들의 떨리는 손길이 아직도 우리 가슴 속을 스산하게 흔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