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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정일 선생은 클래식 음악 사이트인 고! 클래식 자유게시판에도 활발히 글을 올리십니다.
며칠 전 김지하에 관한 글을 올리셨는데, 김지하 저 사람이 왜 저렇게 가는가 의아한 분들(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만)의 의문에 답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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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
글쓴이 장정일 (xtopa)
2012/12/29 19시 42분
뛰어난 문학 작품이 자신도 모르는 충동을 드러내는 반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해명의 욕망에 겨누어진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상당히 정제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흰 그늘의 길>(학고재, 2003)은 김지하를 이해하는 최상의 텍스트다.
그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는 앞으로 글을 쓸 아이다. 이 말을 잊지 마라. 사람이 글을 쓰려거든 똑 요렇게 써야 헌다. 한 놈이 백두산에서 방귀를 냅다 뀌면 또 한 놈이 한라산에서 ‘어이 쿠려’ 코를 틀어막고,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펄쩍 뛰어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쾅 떨어진다. 요렇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라서 눈을 크게 치떴던 아이는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내 문학의 중요한 규범으로 깊이 간직”했다가, 자신의 이름을 최초로 떨치게 만든 장편 담시 ‘오적’의 첫 줄을 이렇게 내갈겼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독자들은 이 문단을 통째 기억해 두시라.
1974년 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곧 무기형으로 감형된 다음, 10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듬해인 1975년, 감옥에 있을 때 알게 된 인혁당 조작 사건을 폭로한 그는 다시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독방에서 폐소공포증을 얻은 시인은 감옥의 쇠창살과 시멘트 벽의 먼지구덩이를 토양 삼아 자라나는 풀씨를 보고 일종의 개안을 했으니, ‘생명’의 존귀함과 그것을 ‘모셔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온갖 서구 합리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가 풀씨를 통해 영성과 동양 사상에 입문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1979년 가을 박정희가 죽고 1980년 3월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시국 사범 대부분이 석방되었으나 김지하는 제외됐다. 그가 버거웠던 신군부는 언제라도 그를 창피 줄 수 있는 각서를 받아놓고자 했다. 고민 끝에 김지하는 장자(莊子)풍의 각서를 중앙정보부에 제출하고 그해 12월에 석방된다. “내가 지금 조물주를 벗 삼다가 싫어져 또 허무의 기운을 타고 육극(六極) 밖에 내달아 우주를 들며 나며 태허(太虛)의 광야에서 노닐고 있는데 네가 지금 나에게 와서 옹색스럽게 천하 다스리는 정치 따위 문제로 나를 괴롭힌단 말이냐?”
옥고에서 풀려난 김지하는 동지와 후배들로부터 투쟁의 선봉에 서줄 것을 강요받았으나, 그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 결정론적 변혁 운동보다 한 차원 높다는 생명운동과 영성운동으로 옮아가 있었다. 이때부터 ‘구도자’를 자처하는 그와 운동권 사이에 반목이 싹텄다. 김지하의 전향 기점을 ‘분신 정국’이라 불리는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기고문에서 찾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는 두 가지 숙고 사항이 있다. 첫째는 생명을 모셔야 한다는 그의 시각에서 ‘자살 행진’을 방관할 수 없었다는 점. 둘째는 <흰 그늘의 길>에서는 귀띔만 한 채, 각종 보수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가 꺼내놓은 ‘김지하 번제(燔祭:제물로 바침)설’ 그의 가족들은 유신 시절, 극좌 인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김지하로 하여금 더 공격적인 글을 쓰게 하여 사형을 받도록 하거나, 그를 암살해 정권을 타도하는 지렛대(희생양)로 이용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문제의 기고문은 1991년의 분신 정국을 김지하 자신의 경험 내지 망상(妄想) 구조 아래서 파악하려고 했던 글로, 시인은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번제설의 배후를 아는 대로 밝혀야 한다.
동학·동양사상·선불교에 매진한 시인은 심신의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자기 분열과 불면의 고통 속에서 ‘헛것’을 보기도 했다. 1987년부터 정신과를 찾게 된 그는 그것을 ‘영적 체험’으로 설명하고자 하며, 실제로 저명한 정신과 의사로부터 ‘종교적 환상’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 결핍과 그것을 상쇄해준 엄청난 명성의 퇴색 과정을 보면 그가 앓은 병이 갖은 상실과 연관된 우울증이며, 그것의 합병증이 한때 알코올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것을 회고록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우울증이란 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좀스러우니까.
지난 11월26일 시인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후에 쏟아낸 여러 차례의 언사를 종합해보면, ‘후천개벽에는 여자가 왕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우주의 정세’란다. 뛰어난 명문으로 기록될 1991년 5월5일치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정치란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도덕적 확신에 기초한 엄밀한 이성과 수학의 세계”라고 일갈했던 그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논리이지만, 이제는 독자들도 이게 웬 ‘구라’인지 알리라.
김지하의 여성 대통령 대망론은 변절이 아니라 그보다 더 뼈아픈, 이론과 실천의 파탄이다. 생명을 받들어 모시는 여성성에 대한 희구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회고록에도 그들먹하지만, 일찍이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동광출판사, 1984)에서부터 천명되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 제 생각과도 같습니다. 즉 여성적인 덕성이 앞으로의 세계에 있어서의 평화, 관용, 화해에 중요한 몫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 가까이 그 어떤 여성 정치인도 ‘서포트’한 적이 없었던 시인이 아버지의 신원 말고는 정치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독재자의 딸을,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지지한다? 그는 회고록 2권 어디에 자신은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 도그마 신봉자”와는 잘 어울릴 수 없었기에 극좌는 물론이고 “극우적 반공주의자들과도 어울리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도그마 신봉자일 뿐 아니라, 요즘은 극우 반공주의자들과도 잘 지낸다.
[김지하는 박근혜 지지 선언 이후, 강연과 대담을 통해 자신은 감옥에서 박정희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박정희와 모든 것을 청산했다는 식의 말을 거듭하고 다니는데] 회고록 1권 어디에는 2001년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일인 시위를 하는 시인의 사진과 함께 “그린벨트로 산림을 보호한 것 이외에는 박정희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아이엠에프는 박정희 때 시작된 환란이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런 독설도 모두 외할아버지가 조급히 가르친 허장성세와 ‘좀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시인의 강박이 빚어낸 휘황한 말장난이었던가? 본디 4·19를 마뜩해하지 않았던 김지하에게는 그것을 부정하는 향후 행로만 남았고, 우리에게는 이문열이 그를 모델로 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구차한 즐거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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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7일자로 발간된 모 주간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편집부가 붙인 원제목은 따로 있지만, 고클에 올리며 제목을 바꾸고, 분량상 넣지 못했던 [괄호]속의 말을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