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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 백과 부분 발췌-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12-30 22:17:53
추천수 2
조회수   987

제목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 백과 부분 발췌-

글쓴이

김병현 [가입일자 : 2006-09-19]
내용
Related Link: http://ko.wikipedia.org/wiki/5%C2%B718_%EA%B4%91%EC%A3%BC_%EB%AF%BC%EC%A3%BC%ED%99%94_%EC%9A%B4%EB%8F%99

언론 보도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91]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92]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93]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입이 끝난 직후 도청 안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군을 계엄군 병사가 때려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93]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했다.[94]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은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 회고했다.



5·18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서청원은 9박 10일간 광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5·18 광주항쟁 특파원 리포트〉를 공동 발간했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간했다”고 말했다.



종합편성채널인 JTBC가 개국하면서, 1980년 당시 TBC 동양방송이 "80년 광주"라는 미공개 단독 영상을 방송하였다.[95][96]



다른 나라의 언론 및 기자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세계에 타전했다.[97]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의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98]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의 홍콩 특파원인 마쓰나가 세이타로는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99][100]



미국의 AP 통신 기자인 샘 제임슨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101]



미국의 선 지의 서울 특파원인 블레들리 마틴 볼티모어는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칭 등 사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102][101]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시민군과 생사의 고락을 함께 했다. 그는“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03]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04]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이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운다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05]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인 기자인 노먼 소프는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AWSJ) 기자로 근무하던 중 5·18 민주화운동을 겪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06]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07]



AP 통신 기자인 테리 앤더슨 (당시 LA타임스의 일본 지부 총국장을 지냈음)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108][109]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인 노먼 누트 타프 역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0]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인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1]



학계의 평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라고 강연했다.[112]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113]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05년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에 보도된 논평에서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는 견해를 밝혔다.[113]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도 2005년 12월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5·18을 기술하기도 했다.[113]



인권, 시민운동가들의 평가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태국의 시민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앙카나 닐라파이지트는 “힘 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주는 감동은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며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밝혔다.[113]



광주인권상의 2005년 수상자인 와르다 하피즈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은 “5·18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의 표본이자 목표”라고 높이 평가했다.[113] 2003년 수상자인 단데니야 G. 자얀티 스리랑카 실종자기념회 대표는 “나에게 5·18은 인권투쟁을 위한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치켜 세웠다.[113]



5·18기념재단에서 국제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리핀 태생의 인권운동가 페드로 라혼은 “5·18의 역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 전파돼야 한다”며 “광주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한 정신을 마음 깊이 지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극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113]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는 깨어 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며 "이런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14]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115]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혀왔다. 그는 언젠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116]



198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경호를 맡은 청와대 경호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며 광주시민들을 보듬었다.[117]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122]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123]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이들 극우 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124]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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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2012-12-30 22:19:04
답글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 <br />
<br />
이렇게 믿는 사람도 분명 많이 있을 겁니다.

yws213@empal.com 2012-12-30 23:16:10
답글

동족에 의한 극단적인 학살의 만행을 역사적으로 고발하며 그같은 일이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로 인간이 인간을 말살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장 비인간적인 측면에 대한 고발로서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는 참담함과 쓰라림이 남는군요. 광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정신적인 치유에 대항 부채를 언제쯤이면 제대로 씻어 낼 수 있을지 참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광주의 아픔을 생각할 제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

국천수 2012-12-31 13:56:55
답글

언젠가도 댓글로 적은적이 있지만 그때 돌아가신 대부분의 희생자들의 사인이 얼핏 생각하는 것 처럼 총상이 아니었습니다. <br />
대다수가 뭉둥이에 짖이겨지고 칼에 난자되어 죽었습니다. <br />
그걸 점잖게 자상 이라느니 또 뭐라드라??? 하여튼.<br />
그 참혹함이란 글이나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들고요.<br />
그런 죽음앞에 이성이 남아있다면 살아있는 예수나 부처 이었겠죠.<br />
훈련된 공수부대원과 일반시민은 전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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