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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 - 최치원과... 하얀고래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12-22 19:38:23
추천수 1
조회수   506

제목

멘붕 - 최치원과... 하얀고래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board.wassada.com/iboard.asp

신라에 돌아와 경세를 펴고자 했으나,,



그 벽에 부딪혀,,,,,,,,,, 멘붕- 최치원 !!!





무슨 사화에 연루되어, 떠돌아다닌.......... 멘붕 김시습 !!!







이 두분은... 현실정치에 참여해,, 치국평천하를 하려 했으나



정치판의 오욕에 쫓겨난 극소수 야인들 이었지만,,





제가 줏어들은 바로,,, 이 분들은 단순히 학자나,, 사상가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대도무문에 들어선

성현들로 받아 들입니다..



아마도,,





멘붕이........... 毒 이 되지 않고



藥 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비룡승천 !



송창식 고래사냥의,,



동해 바다에서 잡아야 될 하얀고래는,,, 육지의 메뚜기나 흑고래가 아니라



( 어차피 정치는....... 고만고만 하고

언제 하늘에...... 먹구름이 없던 적이 있었나 ??? )





하얀고래는............ 불멸의 영원한 것~~~



내면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최치원, 김시습 외에,,,



조선시대의 천주교 신자~~ 정약용 선생님도,,, 그 무슨 사화에 연루되어



그런 멘붕을 겪으셨으리라.. 전남 해안가로 유배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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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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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종리권진인(鍾離權眞人)



- 최치원, 최승우, 김가기 <------------------------





7.여동빈(呂洞賓)





최치원 선생님이... 도교의 진맥을 이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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