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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뺨과 어머니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12-22 21:03:09
추천수 4
조회수   1,545

제목

주먹뺨과 어머니

글쓴이

정진경 [가입일자 : 2009-09-13]
내용
여름 내내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시다바리로 일을 했습니다. 기술이 없어서 벽돌 져올리고 시멘트 비볐습니다.

땡볕에 8주 넘게 일했는데, 도급으로 일한 마지막 4주분 임금을 집장사 사장이 안 주고 다른 공사장으로 옮겨가더군요. 십장 한 분, 미장이 두 분은 다음 공사장 따라가고, 돈 못 받은 대여섯 명은 다시 일 찾으러 새벽시장에 나갔습니다.

결국 학기 시작에 쫒긴 제가 총대를 메고 매일 사장 집에 갔습니다. 대문이 열리면 마당에도 밀고 들어갔죠. 일 주일쯤 지났을 때, 경찰차가 오더니 다짜고짜 저를 끌고 가더군요.



가보니 주거침입, 폭행(얼굴도 못 본 그 집 도우미가 4주 진단)으로 얽었더군요.

경찰서에서 이틀 시달리고 남부지검 조사 받으러 가는 길에 주인집에 전화해서 어머니한테 학교 일로 여행 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이미 60대 중반이셨던 어머니는 무슨 눈치라도 채셨는지, "험한 일에 끼어들지 마라. 몸 다칠 일 생기거든 빌든지 도망쳐라" 하시더군요.



검사실 나무 의자에 묶여 조사를 받는데, 마흔은 되어보이는 서기가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면서 수갑 찬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게 하고는 30센치 쇠자로 계속 내려쳤습니다. 이 때 왼손 엄지를 다쳐 평생 제대로 못 쓰게 되었죠. 왜 제 말은 듣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면, "데모나 하고 다니는 빨갱이 새끼가 어디서" 하면서 책상을 돌아와서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습니다. 데모하다 붙들린 전력을 들춘 모양이었습니다.



두 시간 쯤 뒤에 어린 검사가 왔습니다. 서기가, "영감님, 이 새끼 영 벽창호인데요?" 하고 일러바치자, 바로 검사의 주먹뺨이 너댓 번 날아왔습니다. 첫 주먹에 묶인 의자와 함께 뒹굴었더니, 서기가 의자 등받이를 잡아주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무슨 건으로 걸린 개새끼야?" 무슨 건인지도 모르면서 주먹뺨부터 날린 거죠.

검사는 다른 일로 바쁜지 계속 들락거리면서 제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때마다 서기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섰습니다. "빨갱이 새끼가 노가다들 선동해서 돈 뜯으러 다녀?" 그러다 나가면 서기는 다시 쇠자로 손가락 내려치고, 반나절 내내 그러더군요.



그 꼴을 이틀 당한 뒤 서기가 말했습니다. "사장님한테 빌면 돈도 주고 영감님도 기소 안 하시겠다고 하니 그래라."

빌든지 도망치라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늦자식 홀로 키우신 어머니한테 험한 꼴 보여드릴 수 없었죠.

우리가 받을 돈은 일인당 18만원인데, 사장은 5만원씩 주겠다고 한 모양이었습니다. 합의서에 지장 찍고, 다음 날 풀려나서 그 돈으로 치과에서 어금니하고 입 안 상처 치료 받고 여인숙에서 얼음찜질 하며 일주일을 지냈습니다.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어머니께 험한 꼴 보여드리지 않게 된 걸로 마음을 다스리려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때가 오카모토 새끼 독재 마지막 해였으니, 수 십 년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 일로 악몽을 꾸다가 깹니다.

데모하다 잡혀간 유치장에서 맞던 고무방망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덜 아프면서도 죽을 만큼 모욕적이던 주먹뺨, 내 사정과 하소연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답답함, 그런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바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걸려들어 모진 고문 당하신 수많은 분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상처를 입은 걸까요...



이번 선거 결과는 단순히 정치적인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승리나 문재인과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악의 승리이고, 저 개인에게는 악몽의 귀환이며,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배와 독재와 분단과 지난 5년간 벌어진 대중조작의 처절한 결말입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 이 기가 막힌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손을 놓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손으로 열지 못한 근대, 우리 의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왜곡, 우리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분단... 정말 무엇부터 해야 할지 찬찬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몸을 일으킬 기운이 생기지 않을까요...



긴 넉두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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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수 2012-12-22 21:07:12
답글

정의가 실종된 시절이었습니다. <br />

정형진 2012-12-22 21:11:17
답글

가슴이 답답하고 아픕니다.

염일진 2012-12-22 21:11:22
답글

아직도 어두운 우리 사회입니다....ㅠ.ㅠ

정현철 2012-12-22 21:12:20
답글

억을함이 아주 생생히 전달됩니다.

서광철 2012-12-22 21:14:18
답글

먹먹합니다...

조훈식 2012-12-22 21:14:37
답글

실추된(?) 지 애비 명예를 찾겠다니 먹먹할 따름이네요.

박태희 2012-12-22 21:16:39
답글

아이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ㅜㅜ

uesgi2003@hanmail.net 2012-12-22 21:17:36
답글

공권력이 강자를 보호하고 있으니 세상이 달라지지 않죠. 답답합니다.

임상욱 2012-12-22 21:22:32
답글

프랑스가 왜 선진국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br />
올바른 역사교육만이 이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제 어린 자식부터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br />
기회는 평등 / 과정은 공정 / 결과는 정의

정진경 2012-12-22 21:25:14
답글

주신 댓글에 큰 위로 받습니다.<br />
다 함께 일어나야죠...

김세욱 2012-12-22 21:26:41
답글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런 분들의 울분을 품어주진 못할 망정 분열과 갈등을 유발한다며 사회를 불안케 하고 나라망하라고 저주한다는 뻘소리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꼭 읽혀주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면 퍼가도 될까요?

정진경 2012-12-22 21:29:39
답글

세욱님, 물론입니다...

김병삼 2012-12-22 21:29:43
답글

끔찍했던 시대의 기억이네요.<br />
이번에 1번을 찍고 흐뭇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게를 둘러보고 있을 박의 지지자들도 세월이 지나면 <br />
지금의 선택에 대한 뼈저린 자책을 하게 될 의식의 변화라도 갖게 된다면 다행일텐데요.<br />
아무리 당해도 그 가해의 본질을 굳이 외면하면서 왜곡된 사고를 갈수록 공고히 하는 모습을 보면<br />
그냥 답이 없습니다.

신석현 2012-12-22 21:32:30
답글

냉엄한 현실인식을 부르짖고 있지만<br />
님의 글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장철주 2012-12-22 21:46:11
답글

너무나 억울함이 전해집니다. 부디 모든 행운이 앞으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조영재 2012-12-22 22:04:12
답글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신동용 2012-12-22 22:18:27
답글

영감 영감... 그시대 검사정도면 정말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했을텐데 그런 주먹질은 <br />
<br />
어디서 배웠는지 참나 ..

정진경 2012-12-22 22:21:51
답글

모두들 힘드신데 제 넉두리 땜에 더 우울해지신 듯해서 죄송합니다...<br />
<br />
몇 년 뒤 살인마 시대에 또 다른 일로 공립교사를 그만두게 되어(전교조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외국으로 돌다가 10년만에 돌아왔죠.<br />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 이런 꼴을 다시 보고는 참담해서 그만...<br />

구현회 2012-12-22 22:22:36
답글

ㅠ,.ㅜ;

최원환 2012-12-22 22:36:21
답글

마치 제가 당한 것 같은 가슴이 싸~ 합니다.

김진형 2012-12-22 23:02:42
답글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젊은날의 마음의 상처에 위로의 말씀 전합니다.

허환 2012-12-23 00:31:16
답글

젊은 시절에 지워지지 않는 불의를 겪으셨네요..<br />
<br />
저보다 더 상실감이 크시겠습니다.

정진경 2012-12-23 00:38:58
답글

위로해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br />
<br />
함께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그나마 이룬 성과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에는 저항하고,<br />
새로 50대, 60대가 될 세대를 향해 진실을 전하고, 역사의 올가미들을 끊을 낫을 갈며 지내다보면,<br />
상처는 아물고 세상도 달라지리라 믿습니다...<br />
<br />

안유림 2012-12-23 01:43:03
답글

TT......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심병주 2012-12-23 07:23:05
답글

참 나쁜 넘들입다 근본부터

김기홍 2012-12-23 08:47:29
답글

ㅠㅜ. 할말이 없습니다

이유구 2012-12-23 08:58:16
답글

요즘은 기대감을 버렸습니다...<br />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김비아 2012-12-23 11:20:14
답글

마음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br />
노인들의 반란이 하도 이해가지 않아 아버지께 진지하게 여쭤봤어요. <br />
박정희 시대가 정말 어땠냐고? 향수 이런 거 말고 정말 객관적으로 말해달라고. <br />
68세. 지식인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회사 다니다 은퇴하신 분인데 <br />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었다." <br />
<br />
어머니께 여쭤봤어요. <br />
"말도 마라.

이민호 2012-12-23 15:49:32
답글

읽는 제가 다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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