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시다바리로 일을 했습니다. 기술이 없어서 벽돌 져올리고 시멘트 비볐습니다.
땡볕에 8주 넘게 일했는데, 도급으로 일한 마지막 4주분 임금을 집장사 사장이 안 주고 다른 공사장으로 옮겨가더군요. 십장 한 분, 미장이 두 분은 다음 공사장 따라가고, 돈 못 받은 대여섯 명은 다시 일 찾으러 새벽시장에 나갔습니다.
결국 학기 시작에 쫒긴 제가 총대를 메고 매일 사장 집에 갔습니다. 대문이 열리면 마당에도 밀고 들어갔죠. 일 주일쯤 지났을 때, 경찰차가 오더니 다짜고짜 저를 끌고 가더군요.
가보니 주거침입, 폭행(얼굴도 못 본 그 집 도우미가 4주 진단)으로 얽었더군요.
경찰서에서 이틀 시달리고 남부지검 조사 받으러 가는 길에 주인집에 전화해서 어머니한테 학교 일로 여행 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이미 60대 중반이셨던 어머니는 무슨 눈치라도 채셨는지, "험한 일에 끼어들지 마라. 몸 다칠 일 생기거든 빌든지 도망쳐라" 하시더군요.
검사실 나무 의자에 묶여 조사를 받는데, 마흔은 되어보이는 서기가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면서 수갑 찬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게 하고는 30센치 쇠자로 계속 내려쳤습니다. 이 때 왼손 엄지를 다쳐 평생 제대로 못 쓰게 되었죠. 왜 제 말은 듣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면, "데모나 하고 다니는 빨갱이 새끼가 어디서" 하면서 책상을 돌아와서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습니다. 데모하다 붙들린 전력을 들춘 모양이었습니다.
두 시간 쯤 뒤에 어린 검사가 왔습니다. 서기가, "영감님, 이 새끼 영 벽창호인데요?" 하고 일러바치자, 바로 검사의 주먹뺨이 너댓 번 날아왔습니다. 첫 주먹에 묶인 의자와 함께 뒹굴었더니, 서기가 의자 등받이를 잡아주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무슨 건으로 걸린 개새끼야?" 무슨 건인지도 모르면서 주먹뺨부터 날린 거죠.
검사는 다른 일로 바쁜지 계속 들락거리면서 제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때마다 서기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섰습니다. "빨갱이 새끼가 노가다들 선동해서 돈 뜯으러 다녀?" 그러다 나가면 서기는 다시 쇠자로 손가락 내려치고, 반나절 내내 그러더군요.
그 꼴을 이틀 당한 뒤 서기가 말했습니다. "사장님한테 빌면 돈도 주고 영감님도 기소 안 하시겠다고 하니 그래라."
빌든지 도망치라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늦자식 홀로 키우신 어머니한테 험한 꼴 보여드릴 수 없었죠.
우리가 받을 돈은 일인당 18만원인데, 사장은 5만원씩 주겠다고 한 모양이었습니다. 합의서에 지장 찍고, 다음 날 풀려나서 그 돈으로 치과에서 어금니하고 입 안 상처 치료 받고 여인숙에서 얼음찜질 하며 일주일을 지냈습니다.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어머니께 험한 꼴 보여드리지 않게 된 걸로 마음을 다스리려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때가 오카모토 새끼 독재 마지막 해였으니, 수 십 년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 일로 악몽을 꾸다가 깹니다.
데모하다 잡혀간 유치장에서 맞던 고무방망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덜 아프면서도 죽을 만큼 모욕적이던 주먹뺨, 내 사정과 하소연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답답함, 그런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바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걸려들어 모진 고문 당하신 수많은 분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상처를 입은 걸까요...
이번 선거 결과는 단순히 정치적인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승리나 문재인과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악의 승리이고, 저 개인에게는 악몽의 귀환이며,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배와 독재와 분단과 지난 5년간 벌어진 대중조작의 처절한 결말입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 이 기가 막힌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손을 놓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손으로 열지 못한 근대, 우리 의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왜곡, 우리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분단... 정말 무엇부터 해야 할지 찬찬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몸을 일으킬 기운이 생기지 않을까요...
긴 넉두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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