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지금쯤 아빠와 온 집을 기어 다니며 놀고 있겠구나. 엄 마가 요 며칠 너와 떨어질 때가 잦아졌지. 왜 그런지 너에게 변명하려고 해. 네가 이 세상에 온 이후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었는지 정말 젖먹던 힘을 다해, 널 젖 먹여 키웠 는데 말이야. 엄마 혼자만의 힘으로는 널 온전히 키워낼 수 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 물론 지금이야 엄마와 네가 함께 있는 게 제일 좋지. 조금 더 지나면 네가 아장아장 걷게 되고 , 말도 하게 되고, 친구와 놀 줄 알게 되면 어린이집도 가고 유치원도 가게 되겠죠.
바로 이틀 전, 우리 동네 성당 부서 유치원생의 원서를 뽑는 추첨을 하더구나. 이웃의 네 살짜리 누나는 다행히 붙었지 만, 10명 남짓 뽑는데 80명도 넘는 아이의 엄마들이 그곳에 서 추첨을 했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곳에 가지 못했어. 더 비싼데, 더 먼데를 알아봐야 할테지. 네 살 밖에 안됐는데 벌써 어딘가에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더구나.
엄마는 널 뱃속에 넣고 저기 부산 영도까지 크레인 위 진숙 이 이모보러 왔다갔다 할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 가. 널 낳고 나니까 엄마는 많은 게 두렵단다. 네 몸과 마음 이 그저 건강하게 바랄 뿐인데 우리가 사는 곳은 그게 참 큰 바람이다. 네가 갈 안전한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결국 못 찾 으면 어쩌나, 학교에 가서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라도 당하 면 어쩌나, 아니 네가 누군가를 괴롭히고 따돌리는 것을 먼 저 배우면 어쩌나, 성적에 목메 죽고 싶게 괴로운 학창 시절 을 보내면 어쩌나, 만일 대학을 포기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거나 니가 하는 노동이 싸구려 취급을 받으면 어쩌나.
아가. 엄마는 매일 이런 상상을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 잡곤 한단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 자리에 섰다. 엄마가 살아가고 네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이 온통 경 쟁과 승자독식의 사회로 변해버린 걸 그냥 볼 수만 없었단 다. 자연은 파괴되고, 아이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자살 하고,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없으며, 노인들은 자기 몸 편히 누울 여유조차 같지 못하는 사회. 너무 미안해서 이대로 너 에게 물려줄 수는 없단다.
엄마는 네가 행복한 아이가 되길 바래. 네가 무얼 좋아하고 뭘 잘하든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학교에서 네가 너 자신 을 사랑하고, 네 친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웠으 면 좋겠어.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은 나쁜 것임을 배웠으면 좋겠어. 경쟁하고 이기는 법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고 문제 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웠으면 좋겠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워서 군사독재 시절의 아픔과 민주화 과정의 많은 희생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어.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멋진 인생 을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어.
그리고 아가. 난 네가 청년이 되었을 때쯤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더 이상 너와 같은 얼굴, 같은 말을 배우고 있는 저 북쪽의 아기들이 굶주리다 죽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어떤 전 쟁의 위험도 다 끝이나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었으 면 좋겠다. 그래. 말을 하다 보니 엄마 꿈이 참 크다.
그런데 또 하나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엄마가 다시 TV에 나오고 네가 그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원래 연기 를 하던 배우라는 걸 네가 알면 좋겠다. 아가. 널 위해 그리 고 엄마 자신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투표의 권리를 행사할거야.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나아갈 수 있는 그 초석이 될 선택을 할 거야. 그렇게 아주 조금씩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에 참여할 거다.
아가. 지금 잠시 떨어져 있어서 미안해. 너의 웃고 찡그리는 얼굴이 벌써 눈앞에 상상하다. 금방 갈게. 사랑해 아주 많이. 2012년 12월 겨울 제 19대 대통령 선거 기호 2번 문재인 대 통령 후보 광화문 유세 현장에서.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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