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삶은 가혹하고, 세월은 잔인하다. 시간(세월)은 공간(사회)과 상호조응하면서 우리에게 무를 흩뿌린다. 사실상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존적 상황을 의식이 견지했다는 차원에 이르렀다고 봐야한다.
나는 많은 말을 했지만 결국 모든 가지는 쳐버렸고 하나만이 굵은 가지가 나의 생에 실천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사유나 관념론이 아니었다. 바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실재적인 차원에서 현실의 진리를 망각하지 아니하는) 존재론적 도상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였다. 본디 나는 성경에서 신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경전에서 부처의 참뜻을, 혹은 선가의 비밀을 발견하지도 못하였다. 공자의 인의는 내게 너무나 사회적인 패러다임을 회구하게 하여, 결국에 내가 그토록 평생을 해매 찾던 ‘개인주의적 인간학’을 처음부터 봉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거기서 배움을 얻었을지언정, 뜻은 세우지 못했다. 단순히 ‘세속성의 차원’과 ‘정신성의 차원’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오늘날에 와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나는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한다. 그토록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대중이 침범하지 못하게, 마치 종교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신성시하고 개인들의 대화에서 교조주의로 빠졌듯, 그들 역시 교조주의적 신성을 그들의 전문분야에서 보이지 않는 방어막 같은 것으로 둘러버리지 않았는가.
많은 거대담론에 대한 이론들이 학계와 정치에 ‘일련의 권력’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보다 비전문적으로 신문과 잡지의 칼럼에 그럴 듯이 서술되고 있지만 주류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맥박을 잃은 것은 오래전 일이 되었다. 이권에서 완벽히 분리된 사유의 세계, 즉 인문학의 세계를 접고 들어가는 태도는, 오히려 오늘날의 인문학도들에게는 세련되게 보이는 태도일 것이다. 비단 인문학도의 앞길만 힘든 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많은 청년들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일방적인 성공담에 움츠려있다. 즉 미디어는 우리의 이해와 패러다임을 생성하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움직인다.
한국사회에서 누가 ‘차이’에 의거한 개인에 대해 생각해보는가? 자기완성 같은 이상한 상투적 용어는 집어 쳐라. 자기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특이한 염세적 삶과 운명에 지쳐 살더라도, 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긍정적이고 부유한 사회적 삶만 바라보면, 정작 자기 자신은 텅 비어버리고, 존재의 의미는 결여된다.
하기야 누구나 똑같은 방향을 지향하며 경제적, 문화적 흐름에 따른 유행의 궤적을 따라간다면, 이것은 공산주의의 전체성을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가 그대로 답습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고, 거기에 ‘개인’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을 신봉하고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무신론자이다, 유물론자다고 자청한다. 그런데 그들이 무신론의 입장을 설파하면서, 유신론과 신비주의적 세계의 깊이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 밖의 지점에서 무신론의 패러다임을 완성했는가? 그들은 실증적 역사를 암기하듯 신봉하고 역사적 가지성에서 이 복잡한 세상을 귀납하고 몇 줄기의 연역을 만들었다. 이성 우위 일변도, 즉 이성에서 시작해서 이성으로 끝나는 학문의 역사, 이것이 낡은 학계가 만든 세계이다.
그래, 나의 글은 낡았을까? 나도 모르겠다.
1
불안과 긴장이 엄습해온다, 팽팽하게. 손아귀에 땀이 약간 흐른다. 내면의 소리를 풀어내지 못하면 이것은 마치 술이 사람을 잡아먹듯 한 영혼을 삼킨다. 젊음이 여기 있는데 젊음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치열하지 못해서이다. 쉽사리 제문제에 포기를 선언하는 패배주의적 버릇 때문이다. 왜 우울한가? 이는 자신을 속였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구속은 지속적인 불안과 우울, 말하자면 실존적 삶에 대한 패배를 한 아름 안겨준다. 그렇다면 왜 자유가 없는가? 그것은 이미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는 본래와 이의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혈액은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근거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는 습관이고 어디까지가 진리를 구명하는 주체로서의 사유일까? 이를테면 기억과 기억을 귀납적으로 교호하면서 자신을 정립해나가는 것, 이 그릇됨-하나의 착오, 죽치고 앉아서 과거를 끊임없이 회구하는 나쁜 버릇이 정합성에 매개되지 않은 채 자기통일성을 완성하지 못하는바, 즉 현재와 아우르지 않고 다만 과거를 사는데 그친다는 것 따라서 과거에 유리됨, 이는 단지 병적인 슬픔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혹은 영혼적 결락에 가까운 기억에 대한 밑도 끝도 편력에 지나지 않는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서의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엇이 있는가? 휠덜린의 말처럼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있을까? 칸트의 말처럼 끝까지 정신에 의지해야 할까? 어디에 진정한 자신감이 있는가, 자기당착과 기만에 빠지지 않는 자명한 빛과 같은 진실한 자신감은 이 삼라만상의 공전 속에서 어느 지점에 귀속되어 있는가? 개인은 행복 위에서 너무 오만해지고, 불행 아래서 너무 큰 신음을 흘린다.
내 앞에 무엇이 있든 맞서 싸워야 한다. 더 이상의 도피와 같은 겉돌기를 지시해서는 안 된다. 형체가 없는 형이상학적 마수에서 이탈하는 것, 이 마귀의 테크네(손 안에 있음)의 Zeit(시간성), 이를 잊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또한 개인에게 있어서 물리적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환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차이 없음이요, 말하자면 슬럼프를 동반한 무시무시한 매너리즘이자 텅 빈 존재다. 인위가 만든 시간성을 자기를 통해 극복하고, 초월했다고 거만하게 말할 만큼 가차 없는 무식한 당위를 확립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이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를? 자신을 지워버려야 할까? 완전하게, 투명하게, 어떠한 방랑의 기록도 없이…, 아니면 이것을, 내 과거의 총체를 떠안고 언제까지나 지리멸렬한 반정립의 무한에 기생해야 하는가. 어디까지나 종합이라는 탈출구를 보지 못한 채 끊임없는 과거를 반성하는 현재, 이 결락에 웅크려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깊은 우물에 빠진 지 오래 되었고 우물은 막혀 있는 것이다. 구원의 줄은 내려오지 않는다. 이 줄을 내려오게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정신임을 알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물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내 의식이 목도하고 이러한 목도를 내가 의식함이, 요컨대 나의 불행을 지켜보는 의식에 대한 인식을 내가 의식함은 얼마나 불행하고 끔찍한 일인가?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는데. 따라서 흔들리는 배와 같다. 본시 흔들리는 배를 바로 잡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배는 언젠가 좌초될 운명에 있다. 과정으로서의 생이 말만 번지르르하지 얼마나 고통과 번뇌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지!
빛이 조그만 방에 새어 들어온다. 이 노란색은 차갑게 번진다. 가만히 응시하면, 이것은 7가지인 무지개색깔로 분류되어 서서하게 방 안에 낮이 있음을 알린다. 그런데 이 낮은 이미 내게 낮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밤에 가깝고, 나는 이를 움켜잡을 수 없다. 핸드드립을 위해 물을 올려놓고, 분쇄기에 원두를 40g정도 간다. 이렇게 내 낮은 시작되고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몇 차례 피운다. 그러면서 대변과 소변이 정리된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의식儀式이다.
2
기차가 떠나려는 참이었다. 안개가 역사를 희뿌옇게 적시고 있었다. 좌석에 앉아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바깥은 출발과 함께 점차 희미해지면서 시시각각 변화된 풍경, 하나의 유위변전을 나타내고 있었다. 청량리역에서 혼자 출발한 여행이었다. 모든 거짓된 이성을 배제한 채 감정에 의지하여 잊어버린 기억의 총화를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맥주 캔을 땄다. 기내에서 사려면 뭐든지 바가지이기 때문에, 돈을 아끼고자 차를 타기 전 사온 국산맥주와 엇비슷한 가격의 버드와이저 6캔. 빈속에 먹기에는 위장이 아파 오징어를 샀다. 강원도를 종착지로 해서 모든 기만된 의식세계를 진정한 감수성의 식칼로 갈기갈기 난도질하듯 찢어버리고, 오직 살아온 기억에만 의지하여 사회가 만든 허구의 ‘나’를 단죄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따라서 나는 유치원 시절부터 회구하려고 애썼다. 동두천에 살 시적 성실성교원에 다니던 4살 때 나는 어떤 세계를 보았는가? 6살 때 나는 어떤 유치원 교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과 같은 어떤 자명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게 불확실하다.
내과에서 지어온 향정신성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꺼낸다. 물론 자기위해서 먹는 게 아니다. 좀더 이성과 의식에 동떨어져, 맥주와 함께 진실한 내 모습을 현현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알콜과 스틸녹스, 담배의 연기에 삼중으로 빠지다보면(마치 미국에서 혜민이형이 권했던 마리화나와 유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삼위일체-이러한 쾌락의 한가운데 나는 이미 내가 아니며, 그래서 이미 나는 나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나의 사랑, 유년에 그 번쩍이는 감각이 지향했던 어떤 소년을 향한 내 멈추지 않는 영혼적 파토스를 지금 여기로,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그토록 강조했던 ‘사태 자체로’ 있기 위한 휠덜린적 패러다임의 파토스, 내가 행하고자 하는 바가 심오한 감수성의 모험의 틀에 이를 끼워 넣기 위한 유미주의자의 감각적 시도임을 나는 알며, 이 기차-기차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나는 이미 물에 있는 걸 잊거니와 나의 이러한 물고기와 같은 노님, 단순히 창밖의 배경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가차 없는 감수성에의 육박함-와 함께 나는 끝끝내 진실하고 모든 세속적 그림자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神) 앞에 서는 것이다!
기내에는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가족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연인들, 젊은 친구끼리 뭉친 모임, 등산객들, 그리고 이미 도취되어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얼간이 같은 여행객이 돼서는 안 된다, 나는 외계를 목적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내계를 목적으로 출발한 감성과 기억의 구도자다. 나는 과거의 장면과 장면이, 소리와 소리가, 궁극적으로 기억과 기억이 수없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과거를 복구해내야 하며, 이는 마치 유화를 복원해내는 작업에 버금가는 힘든 작업이고, 나를 인두로 지지듯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소급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전체적인 개시에 가까운 것이다.
창밖의 풍경은 어느덧 시골이었다. 무궁화호의 유리창은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바깥은 마치 80년대 찍은 사진처럼 희색의 광학효과가 여과하여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듬성듬성한 나무들이 선로 바로 뒤편에서 내 근시안에 그려지고 있었고, 멀찍이 떨어진 산들이 내 원시안에 어렴풋한 반영의 그림자를 나타냈다. 이러한 배경의 원근감은 결국 나 자신이 정신의 주체라는 느낌을 자못 뚜렷하게 느끼게 했다. 遠知한 사유도 종국에 자신의 초월적인 정립에 따라 가까워 질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세계와 하나가 되어 세계-내-존재로 있는 것이다. 본디 자신을 완전하게 통제하면 물자체 또한 완전하게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아, 나는 나도 모르게 사회적 정신에 의해 완전히 통제받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는 더욱더 속력을 내어, 산의 터널을 관통하고 있었다.
3
기차는 철로를 비끄러매고 멈추었다. 잠깐의 휴지기였다. 나는 이미 맥주와 스틸녹스에서 벗어나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한 순간의 평온만 줄 뿐 결국 아무것도 못한다. 마리화나 중독자들이 방 안에 모여 계속 누워있는 것처럼.
그리고 생각,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우울증 환자로 살아 간지 9년 동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그냥 악귀가 아닌 마왕 루시퍼가 있다. 그 타락한 천사가 나를 타락시킨다. 나 또한 순결한 정신에서 이미 멀어지지 않았는가? 기독교,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오직 그분 삼위일체 하나님밖에 없을 것이고, 내 근원 역시 신을 예외로 하고는 엄존하지 못할 것이리라.
전동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이 후드득 창가를 내리쳤다. 나는 서글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한 비애가 뇌리를 스쳤다. 여자에 관한 것이었다. 수윤이에 대한 모든 것이 오버랩 되었다.
수윤, 정신병카페에서 만난 동갑내기 여자, 외모는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샤프하다고 해야겠다. 첫 만남에 수윤이와 택시를 타고 카페에 들어가 말을 하려고 했다. 수윤이는 정신분열증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말하건대 그녀의 지적 능력과 의식지평의 광활함은 교수를 가르칠 수 있는 대학생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녀는 문단의 현실을 알고 있었다. 연극지망생이어서 성형수술도 받았다. 나는 여자경험이 전무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여기는 너무 공공성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다른 데로 가자고 했다. 솔직히 나는 정신의학과 약리학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여자와 함께 들어온 모텔, 방값은 3만원. 나는 그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아리송했다.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서로간의 경계감의 표시로 쓰는 상투적인 존댓말. 지겨워 방에서 나가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이마에 키스해도 되요?” 나는 이 여자가 정말 정신이상자가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수수하게 생겼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그럼에도 나는 찬성했다. 이마에 그녀의 립스틱 자국이 묻어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우리들은 매일같이 왕래를 했다. 다만 스킨쉽이나 성교는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성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여자는 여자다, 못생기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은 데도 성욕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DNA와 나의 DNA가 유사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를 이용했다. 돈 한 푼도 없이 가서 담배 3갑, 버거킹 최고급 커플 세트, 커피빈의 티라미스 케익, 나뚜루의 파인트, 식후 카페베네에서 5Shot라떼 5잔, 그리고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꿔 달라고 요구한 7만원. 서민에게는 많은 액수의 돈이 나로 인해 쓴 것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내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내 글을 읽었고 전화를 했고, 자신을 지켜줄지 알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도 벅찼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하는 것이고 그걸 막는 방해물은 이용하고 버리면 된다. 만일 그녀가 해박하지 않고 보통 여자처럼 멍청하고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잘 빠졌다면, 그녀는 일생일대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고전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유·불·도에 능통한 대가에게 해박, 못생김vs무식미모 중 선택하라고 했더니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백치이지만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그녀는 담배를 피웠다. 에세 1mg였다. 카페배네 흡연석은 에어컨 때문인지 시원했다. 나는 람보르기니 8mg를 피우고 있다. 이론적으로 치자면 내가 그녀보다 8배 빨리 죽어야 한다. 그러나 담배의 성분은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만 가지다.
“너의 글은 랭보를 생각나게 해.”
그녀가 운을 떼었다.
“문단에서 수상한 작품들 읽어보면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야. 분명히 문단의 고질적인 문제인 대학교를 어디 나왔나, 대학원을 나와 박사과정을 거쳤나 보는 거야. 그 작품은 그냥 대충대충 읽고.”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편입을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예술대 연극과에서 자퇴한 그녀는 선후배 관계에 따라 특권이 부여된다는 기성적 특질 때문에 돈만 버리고 나왔다고 했다.
“너 황보석이라고 알아?”
“누군데?”
“번역가야. 나랑 갈라선 번역가. 그분이 나를 천재라고 인정해줬지. 내 글에는 진정한 천재의 숨결이 있다고, 단지 대학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라고 질책하셨지. 내 문장이 체계적이지 않고 연속성이 없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분과 30분씩 전화 통화했어. 그 사람 그래 봬도 서울대 인문대학 불문과 출신이야. 그분과 함께 했을 때 난 친구가 없었어도 행복했어. 너무 배불렀었나봐. 인간관계의 이상한 점은 사귀기는 어려운데 결별은 쉽다는 것, 그게 문제야.”
그녀는 3Shot의 독한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다. 나는 처음으로 담배 피우는 여자가 섹시하다는 걸 알아버렸다. 당시 나는 5Shot이었는데 카페라떼였고, 카페배네 사장이 그전에 알바 하던 시절(그러니까 내가 커피에 처음 입문했을 때)에 자주 얘기를 나눴고 그래서 어느 참에 약간 어색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란데 사이즈로 하나 시켰지만 예의 젊은 사장은 웃는 미소로 3Shot을 공짜로 더 부어 나를 만족시켰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멀뚱멀뚱 보았다. 이 여자가 어떤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민망했는지 눈길을 피하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나 역시 민망해졌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야. 나는 영화가 너무 좋아. 디파티드, 좋은친구들, 언터쳐블, 원스 어폰 어 아메리카, 스카페이스, 카지노, 히트, 텍시 드라이버, 드라이브, 레옹 등. 다크필름이 너무 좋아. 내 영혼 뿌리 깊은 어두움을 전율로 물들게 하지. 로버트 드니로는 정말 전설적인 존재지. 난 마틴 스콜세지를 진심으로 사랑해. 나에게 있어 영화는 나의 일부로서 기능해”
“나는 디카프리오가 좋아. 인셉션에서 보여준 그 연기, 그리고 타이타닉에서 보여준 순수한 남성상, 그리고 디파티드에서 보여주는 오버연기! 정말 카리스마 있는 배우야.”
“랭보 나오는 영화 뭐더라, 아 토탈 이클립스에서 미성년자 디카프리오가 자지 노출한 거”
그녀와 말이 너무나 잘 통해 놀랐다. 내가 IMDB top 250의 영화를 다 보았고 일일이 자랑삼아 그것을 과시했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는 웃을 뿐이었다.
람보르기니 L8의 연기, 이 향, 이 강렬한 느낌, 게다가 한국에서 제일 빨리 타들어가는 담배다. 나는 커피와 담배가 겹치면 나타나는 황홀감에 젖어 창가를 바라보고 말았다.
4
자기통제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동양사상 중 어느 것은 자신에게 절대 관대하지 마라 주장한다. 우리가 타성에 젖어 있는 동안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흐른다. 결국 젊은 인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열정의 날개가 꺾어진다.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그런 것이다. 자신이 계속 늙어가고 점점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반면 프로이트는 성욕을 제때 풀지 못하면 불안이 온다고 했다. 이것은 생물학적 불안이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체로서의 실존과 번식으로써의 도구(대를 잇는 가교의 역할과 부의 지나친 축적과 세습), 이 양자는 절대 양립할 수 없으며 한갓 사물(과정·현상·대상·관념·실재를 아우른)적 대립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개별성, 이로 말미암은 자기초월, 통제나 중용이 아닌 극한으로의 기투 혹은 피투. 미국의 우월함은, 서유럽의 우월함은 다양한 개인의 개성과 특질, 인종차이와 언어차이 즉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은 지적 교류로 주관 지워지며, 획일화된 사회적 정신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거니와, 오직 객관적인 권력욕과 부와 명예의 탐욕 말하자면 전체적인 본능만이 그들 사이를 관통할 뿐이다.
앞선 명제에 의거해 세속적 실존의 체계를 사유한다고 하자. 무릇 자신의 재능과 기호를 찾는 건 어렵다. 더군다나 재능과 기호, 부의 창출이라는 실존의 삼위일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제요소가 난마와 같은 실타래처럼 뒤엉켜있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당위성에 자신을 내맡길 도리밖에 없다. 사회는 제도권적 일률화를 요구하고, 기성적이고 반동적인 문화의 형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분야에선 천재적 재능의 숨결이 있는 인간도, 그 사람 인생을 회한과 무의미한 고통에 잠식시킨다. 정말이지 자신이 어떤 일을 잘 하는지 아는 것은 힘들다. 그게 무수할 수도 있고, 자신의 가지성에 따라 본질을 살아야 한다는 건 일종의 부조리요, 한 개체의 기투를 접어두는 일련의 패배이다. 프로페셔널리즘, 이것은 21세기 초현대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개인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분야의 각종 지식들과 체계를 조금씩은 알아서, 이를 총체화·종합화하여 모르고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프로는 프로이되 양심까지 프로인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청년시절부터 재능과 기호, 부의 창출의 삼위일체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노력했는가? 오히려 나는 젊음과 무지에서 나오는 집착과, 한국이라는, 서민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었던가? 시카고에서의 3개월 동안 나는 수백 권의 책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패러다임,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내가 깨달은 사실들, 대학교수들은 낡았고 ‘객관적인 실재’와는 동떨어진 이론을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진행 중인 촘스키 박사나 지젝 같은 철학자들의 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정확한 체계이지만, 그 생명력이 끊어졌다는 것이다(촘스키는 미국학자다보니 자신의 이론을 우회하고 모호하게 말하는 편이 있다). 오히려 개별화·특수화된 프로페셔널리즘과 개개의 무수한 상호조응에서 자본을 질료 혹은 표상으로 삼고, 이러한 다양한 자본주의가 심급으로서 기능함으로써, 계층 간의 빈부격차는 있어도,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서민조차도 공산주의의 일원들보다 부유하고 개선된 삶의 질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부모의 강압으로 인해 회사에서 착취당하다가 미래퇴직자가 되지 않고, 라이프니츠적 낙관주의를 살아볼 수 있는가? 반동적 퍼스펙티브에서 우리 개개인은 모나드고, 어찌 보면 기능이요, 기능의 극한으로 달려감이 충실이자 실존의 원형이다. 중용이라는 개념은 고대 중국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오천년 전 사람이나 논하는 낡은 개념이다. 오히려 극한까지 몰고 가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은 천천히 죽어가고 눈이 멀어간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학생들은 왜 자신들이 실재와는 동떨어진 수학이나 영어를 주입식 암기로 해야 하는지 모른다. 제도권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념을 파악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 똑같은 문제들을 반복해서 푸는 게 아니다. 수학은 인식론의 기초고 인식론은 철학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어만 해도 그렇다.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그들은 암기로 단어나 숙어를 외우지 않는다. 문법도 배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냥 배운다. 차라리 이태원에서 미국인 친구를 사귀어 의사소통을 나누는 편이 낫다. 필자의 경우 카페에서 만난 흑인친구가 있었는데, 책상에서 몇 년을 앉아있는 것보다 몇 개월 동안 체득한 게 더 많았다. 이런 예시들과 명제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공부는 학문으로서 흥미와 기호를 갖고 하는 것이지, 미래의 불안감과 사회적 강박관념에 말미암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연, 스스로 그러함을 의미한다. 제도권 교육조차도 자신이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면 자기기만과 위선에 불과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겉도는 인생을 살고 있다. 왜 제도권 교육에 재능이 없는데 그것을 신경증적으로 하는가? 인생 짧고 겉돌 시간이 없다. 따라서 앞서 말한 삼위일체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로 인해 추론해보자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앞서 말한 개체의 종족 번식으로서의 가교, 전통주의에 입각한 결혼을 중시하지 않는다. 여자를 추구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은 언제나 이혼을 불러와 엄청난 양의 위자료가 깨지고, 환멸을 불러온다. 만일 사업가가 결혼을 한다면, 여자는 내부의 적이다. 여자는 입이 싸서 기밀을 은근히 흘리기 때문이다. 그저 로맨스를 즐기는 것, ‘사태 자체로’, 따라서 앞서 말한 이 모든 것이 요컨대 존재론적 자기완성이다.
수윤이에게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러자 너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그녀는 일침을 가했다.
나는 다짜고짜 운을 떼었다.
“인생은 단 한 번 뿐 이고, 젊음은 그 짧은 한시성을 사는 것이지. 젊어서 기성세대의 질서에 맞춰 기계와 같은 인생을 살고, 느지막이 부를 축적해 늙어서 돈이 많다면, 그 주체는 이빨이 빠지고 자식과 마누라 배만 불려주며 넉넉한 집에서 사는, 하나의 공상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지. 너무나도 슬프지만 다만 일회적인 것, 바로 젊음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차원, 거기에 다다르려면 오직 시간을 망각하게 해주는 불멸의 시, 문학, 모든 것을 망라하는 백과전서적 천재적 지성, 바로 그것에 의해서만이 순간적인 것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지. 오로지 정신에 의지해야해. 그래, 오로지 진·선·미에 전부를 걸어야 해. 모든 건 모사의 세계에 지나지 않아. 만일 네가 흉기에 찔려 죽어도, 과학은 계속해서 최첨단으로 발전할 것이고, 부자들은 자신들이 곧 신으로써 그 자리에 있을 거야. 뉴욕의 맨하튼이나 켈리포니아의 LA를 자신과 너무 연관 시키지 마. 그러니까 네가 없으면 우주도 없어.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세계(메트릭스), 그게 바로 ‘매개’야. 내가 궁금한 건, 너라는 존재자가 존재가 아닌 무로 반정립또는 환원에 들어간다면 종합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돼. 그렇다면 헤겔관념에서의 지양이란 어쩌면 니체의 영원회귀와 어떤 부분에서 연계가 있는 게 아닐까? 아 이런, 어느 참에 모순적인 해학이 되었네! 플라톤과 노년에 헤겔과 대결을 펼친 사르트르와, 헤겔과 반헤겔주의자 들뢰즈를, 뒤죽 범벅 요리해놨군….”
“꼴깝을 떠네~”
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말을 놓은 지는 오래되었다. 나는 람보르기니8L담배 하루 2보루부터 무조건 버거킹 직행 최고급 세트 하루 3번, 카페베네 5shot라떼 하루 2번, 베스킨라빈스나 나뚜루에서 하루 2번, 교통비, 이틀 한 번 영화관람. 그리고 내가 집어먹은 7만원. 그녀가 지불한 돈이 하루하루 가고 한 달이 지났으며, 그 덕에 나 같은 졸렬한 프롤레타리아가 호화롭게 살았다. 그리고 주로 우리는 카페에서 말을 했다.
나는 행복했다. 그녀가 좋았다. 그렇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부조리였다.
5
어느 날 나와 윤은 버거킹 커플세트를 먹었다. 만 오천 원짜리였다. 당연히 지불은 사랑스러운 윤이가 했다. “자, 어디갈래?” 윤이 물었다.
“당연지사 카페베네 흡연실이지!”
내가 끈을 나비로 묶을 줄 몰라 묶어달라고 했을 때, 윤은 마치 내 어머니처럼 끈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내 어머니만이 신발 끈을 묶어 주었다. 내 신발은 난생처음 큰마음 먹고 산(뭐 하이 파이 영역의 파워 엠프 같은 거야 큰마음 먹을 필요도 없다. 윤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는 남자로서 패션 감각에 신경 쓰게 되었고, 그래서 행텐 에어맥스를 샀다. 마이클조던이 광고했던 오십만 원짜리 나이키 에어멕스에 절대 꿀리지 않는다. 단지 디자인이 투박할 뿐이지.
의정부는 완전히 변모했다. 신세계 백화점이 엄청난 규모로 들어섰고 주차장이 대형마트 한 채만했다. 역은 청량리까지는 못 미치지만 상당히 세련되고 스케일이 크게 리모델링 되었다. 거기다 신세계그룹의 지원으로 중앙로는 시장바닥 같은 것에서 거듭나 화려하게 변신했다(이런 것이 미국식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낙수효과다) 타일을 대리석으로 그 긴 중앙로를 다 덮어버렸고, 중간 중간 서울 도심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게 끝없이 이어진 분수대, 동으로 된 거대한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스타벅스가 2층으로, 카페베네가 3층으로, 탐앤탐스가 3층으로, 또 몇몇 3층 커피점 일변도로 윤이와 돌아가며 숫자를 세어보니 중앙로 근처에만 대형커피숍이 20개가 있었다. 게다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면 신세계그룹의 스타벅스가 백화점에 2군대나 있고 백화점 안에 들어가면 또 커피숍이 3군대가 있다. 우리 한국시민 여러분, 그냥 까페라떼 샷 3개만 추가해서 들이키고 또 들이킵시다. 이름 하여 카페민국.
윤과 나는 카페배네에 들어갔다. 언제나 여기에 오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온화해지고 상쾌해진다.
그런데 웬걸 그녀가 지갑을 나한테 주는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라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여자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불안감이었다. 내가 자기를 물주로 생각하는 줄 지각 하는 행동인 것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지갑을 열어보니 만 원짜리와 5만 원짜리 몇 개가 빽빽하게 들어있었다. 집을 뛰쳐나와 의정부에 고시원을 잡은 윤이의 생활비였다. 나는 그녀의 피 같은 돈을 물을 뿌리듯 쓰는 악마다. 하지만 왜 소비가 악인가. 젊은이들의 소비행태를 기성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무릇 발정 난 된장녀가 남자에게 한 달에 사백만원씩 자신의 음부의 냄새로 뽑아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난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는 성교를 안 한다. 그게 내 신념이고 그래서 내가 영지주의적 예술가이며 성자인 것이다.
나는 경계심이 발동했지만, 뭐 그녀가 내게 준 거니까 라떼나 두 개 시키고 올라갔다. 나는 그녀에게 커피를 건네며 앞으로 이런 행동 하지마고 했다. 사람 놀리는 짓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마치 자신의 죄에 대한 물증이 발견되어 흥분하는 범죄자처럼.
그리고 어느 정도 소요사태. 묵묵부답.
황보석 선생님을 전화통화로서 스승으로 섬겼다면, 윤과 나는 실체로써 대면했지만 서로는 서로의 과거-반과거(프랑스철학에는 반과거라는 현상학적 중간 개념이 있다.)-현재-초미래(프랑스철학에서의 예의 개념)를 전혀 모른다. 무릇 우리가 과거와 반과거와 현재와 초미래를 존재자적 열정으로 관통하여 Zeitlichkeit(시간성, Zeit도 시간성이라고 하나 독일에서 이것은 좀더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간성이다. 좀더 관념론적이라고 파악하면 될 것이다)을 잃고 탈아(탈자)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황보석 선생, 그는 나보고 철학자나 문인이 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결코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주는 중요성은 절대적이라는 걸 내게 끝끝내 주지시켰다. 문학응모도 대학과 대학원 먼저 보고 글을 읽는 것이므로 편견이 거기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 인간은 Preunderstanding이라는 색안경에 얼마나 고정관념을 갖는가. 한국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기회의 땅이 아니다. 아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환멸감만 느끼게 하는 조그마한 중진국이다. 세계9위 경제대국이라고 하자. 초강대국 大연방 미국이 1위, 근대에 세계를 주름잡고 엄청난 양의 식민지를 거느렸으며 현재도 금융권이 탄탄한(식민지에서 거둬들인 많은 재화들이 아직까지도 추산할 수 없을 정도다) 영국이 2위, 세속적 미를 극한으로 추구하며 이를 추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결탁했고, 종국에 록펠러 센터를 인수하고 넘버원의 갈채를 받았거니와, 따라서 유교적 자본주의를 건설했던 일본열도가 3위,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바흐, 베토벤 등 경제적인 제반뿐만 아니라 지적·예술적으로도 최고도로 발전했거니와 탄탄한 금융권과 더불어 제조업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지성과 무술을 겸비한 셜록홈즈를 떠오르게 만든다. 놀랄 만한 사실은 마르크시즘과 자본주의가 대립에도 총을 내려놓는 평화적 통일, 미라클을 이뤄낸 독일이 4위, 여기까지만 하자…. 결국 내 슬픔은 윤이와 황보석 선생을 겨냥하고 있지 않았는가? 수윤이를 이용할 대로 이용했고(심지어 스틸녹스를 한 사람에게 과다처방하면 내과 정지당해서 윤이의 돈으로 윤을 세워 스틸녹스를 무더기로 지어왔다).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나는 황보석 선생과 김수윤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사실을….
나는 애증으로 미친 신경증 환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나를 용서한다면…. 나는 하날님(시계태엽오렌지)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요!”하고 말하는 휴머니스트 그러니까 인간에게 기대고 싶은 것이다. ‘人’
역시 유가가 옳았다. 당신들의 말이 맞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거기서 더 발전한 최근의 과학철학적 사회계약론에 의거하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역시 헤겔의 객관주의적 관념론의 헤겔식 변증법에 안주할 뿐이다.
어느새 수윤이는 사색에 잠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 없어 보이는 애가 말이다. 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친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카페에는 사람들의 소근거림, 혼자 자리에 앉아 애플 노트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여자, 책을 읽는 여자, 연인 한 두명, 그들이 소근 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 젊은 곳에서 피어나오는 열정적 의식을 바라보는 의식안의 감수성이, 똑똑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과 나 사이의 긴장은 곧 나사처럼 풀어져서 다시금 현실과 어떻게 지성을 현실에 입각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를 상호조응 했다. 두 남자, 여자 지식인의 단말마와 같은 고통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인문학도는, 학인은 사고의 공전에서 벗어나서는 자기 자신을 확립할 수 없어. 자기 자신의 끊임없는 정립은 어디까지나 철학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철저할 필요가 없어. 인문학의 근저는 세습과 동화된 자유로운 영혼이야. 마치 물고기가 물을 잊고 자신의 본질을 살아가듯, 철학자는 세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세속 자체를 흡수하고 세속과 하나가 되며, 이 지점에서부터 지속적인 영감을 얻거니와, 여기서부터 자기 자신을 되찾기 시작해. 중요한 것은 “행위자=사유가”의 정신적 틀, 일종의 깊이야. 땅을 계속해서 파서 도무지 밑을 알 수 없는 우물을 만드는 것, 세속과 형이상학적 세계 양자를 동시에 사로잡는 단계, 철학의 중요한 근본인 모든 걸 망라하고 종합하는 변별자로서의 이치, 전체성에로의 끊임없는 도약과 기투, 이것이 실존의 최고도의 정합적인 차원이야!
이에 가장 밀접한 철인의 원형을 드러낸 철학자는 사르트르, 그밖에 없어. 마르크스가 언제나 노동자와 함께했듯이, 사르트르는 언제나 대중과 함께하지 않았냐? 카페에서 대놓고 글을 갈겨쓰는 철학자가 역사에 몇 있었냐? 그처럼 알 수 없는 언어를 자신의 책에 써놓고서도, 당시 부와 지식의 중심지인 유럽의 지적 분위기는 언제나 사르트르를 주목하고 있었으며 그는 수차례 목숨을 잃을 번한 테러를 당했지만, 여전히 각국 정부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쓴 소리를 멈추지 않았지. 촘스키조차도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르트르만 못해!
사르트르의 사상은 현대철학사에 있어 실질적으로 크게 윤곽을 드러내지는 않아. 그의 철학과 사상은 무수한 언어유희로 점철되어 있고 그래서 전체적인 체계를 이끌어내자면, 일견 독창적이지만 거대담론에 배치하기에 탁월하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들어. 그런데 그의 인문학적인 접근, 즉 인간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를 멀리 이르지 못했다고 치부하기에는 한낱 예단에 가깝지 않냐 말이야?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어. 언어를 극한까지 사용해서 빚어낸 언어예술로서의 철학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평가받을 수 없나? 자기기만과 위선의 문제, 즉 인간존재의 의식에 대한 탐구에 있어 그는 후설에 비해 좀더 유연하다고 볼 수 있지. 그의 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언어유희에서 벗어나 좀더 유물사관·현실세계로 더 다가가면서 더 노년의 원숙한 지해,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시도, 마르크시즘이 강조하는 전체주의에 경고함과 동시에 인간의 개인성을 여기에 밀어 넣고자 하는 시도는, 그리고 여전히 공산주의의 건설에 희망을 잃지 않는 철학자는 그밖에 없어! 그 미친 듯이 탁월한 들뢰즈도 말했지. 푸코와 라캉 그리고 모든 전세계 철학자들의 한가운데 사르트르가 있다고! 그럼에도 오직 그만이 있었다고! 들뢰즈 자신도 사르트르의 모습에 반해 철학을 시작했다고 말했지.”
윤은 그래 너 말이 맞다하고 묵묵히 반한 듯(단지 내 망상일지도 모른다) 청강하고 있었다. 흡연실 안에 에어컨이 틀어져 있고, 사람들은 한 무더기 조용조용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가 본래 큰 편이라, 나도 모르게 연설하는 꼴이 되었다. 그날따라 윤과 나는 강한 동질성이랄까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말이다.
나는 5SHOT라떼를 즐겨 마시는 편이지만, 이 악마같이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우유가 담긴 커다란 유리잔을 입에 대고 흘려 넣으면, 흥분이 된다. 불안해지기도 한다. 나는 이 독한 커피로 나를 학대하면서 정신이상자처럼 변론을 편다.
“수윤아!”
“왜”
“왜 커피 그 자체는 재미가 없는 걸까? 커피에는 왜 꼭 담배가 필요한 것일까? 왜 독한 에스프레소에는 독한 담배가 어울리는 것일까?”
“그런 법이지.”하고 그녀는 히죽 웃었다.
드디어 람보르기니8L을 꺼낼 차례. KT&G공장에서 람보르기니 카 그룹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만 람보르기니인 굴지의 궐련 회사에서 이태리 기술력으로 만든 담배. 이 담배야말로 이태리, 담배의 천국이자 도리어 흡연자에게 냄새 때문에 뭐라고 했다가 뒤통수 맞는 그 담배의 나라. 그렇다. 커피도 담배도 이태리다. 그리고 한 때 드넓은 미국연방에서 각각의 나라에서 온 엄청난 양의 깡패들 죄수들 중에서 살아남아 마피아라고 불러지는 이태리 갱스터.
미국에는 타부가 있다. 절대 마피아를 속이거나 그들의 돈을 가로채선 안 되는 사항. 날고 기는 드러그 딜러 깡패무리도, 킬러나 다른 계열 예를 들어 야쿠자나 삼합회 같은 족속들도 그들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런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담배인 것이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 열정!
초봄의 햇살이 눈부시게 흡연실 창문 틈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윽고 영광靈光은 곧 7가지 색깔의 무지개로 아스라이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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