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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창관은 서울 동대문 밖 복차교에서 태어나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 행동대로 활약, 정3품 하계 친군영 영관 벼슬을 받고, 정변 실패 후 망명했다가 1886년 모월 모일 피체, 동년 10월 29일 참형을 당한 상것이다. 기록에 이렇다.
기록에서 ‘복차교’를 읽는 순간 퍼뜩 떠오른 게 ‘이 양반 거지왕초 아니야?’였다. 야담 어디선가 복차교 거지굴을 읽어 존재가 기억에 있고 거지패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악명을 떨쳤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하여, 낭창관을 거지왕초로 상정하고 정변 행동대 참가 전前 그의 인생 단면을 덧툼으로써 당시 반청反淸의 사회 분위기를 소설로 엮고자 하였다.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청국의 조선 흡수합병론이 당시 있었다. 조선 왕조가 사라질 뻔한 것이다. 여기서 짚고 싶은 대목이 우리 학계의 역사서술이다. 중국외교사 쪽 논문이 있다뿐, 한국 정치사회사에 요만큼도 언급이 나온 게 없다. 교과서에도 물론 없고, 그래서 선생도 학생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당시 조선 왕실과 조정이 얼마나 경악했을까 불문가지 아닌가. 그럼에도 언급이 없다?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필자는 갑신정변이 그 반응이었다고 본다. 실패했다는 갑신정변. 그래서 갑신정변은 실패가 아니었다. 정권장악에는 실패했어도 청국의 조선흡수론이 두 번 다시 나온 적이 없는 바 이게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라고 본다.
교과서에 요컨대, 갑신정변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 개혁 운동이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 보기엔, 부족하다. 그 이상으로 훨씬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은 현존하고 급박한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다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어쩜 약소국 조선의 국내외적 무슨 복잡한 사정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 때문에 정사에 딱 부러지게 기록을 못 남겼고, 그래서 우리 학계가 주목을 못하고 놓친 게 이 대목이 아닐까 혼자 건방진 생각을 해 본다.
이쯤이면 풍운아 몇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정치사적 접근으로 답이 나올 일이 아니다. 사회사적 접근 말고는 길이 없다. 해서, 갑신년 거사 직전 반청反淸의 사회 분위기를 실증적으로 덧투었다. 이게 『낭창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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