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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마음의 정치, 희망의 정치학(배병삼)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11-09 12:22:06
추천수 1
조회수   369

제목

[펌] 마음의 정치, 희망의 정치학(배병삼)

글쓴이

김창훈 [가입일자 : 2002-08-22]
내용
Related Link: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문재인 대선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했다. 단일화란 하나가 되는 것인데, 쉬운 일이 아니다. 단일화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 다 양보할 마음이 있을 때라야 단일화가 ‘되는’ 것이다. 이게 쉬울 리가 없다.



30년 전쯤의 광고이지 싶다. 매양 2등이던 라면회사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로 1등으로 올라섰다. 이를 계기로 회사 이름도 농심으로 바꿨다. 이 광고에는 코미디언들이 출연했다. 형은 구봉서씨가, 아우는 고 곽규석씨가 맡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면서, 그릇을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형인지 아우인지, “그럼 내가 먼저, 헤헤!”라며 독차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끝마무리의 얌체 짓이 얄밉지 않게 보이려면 코미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광고는 제법 뜻이 깊다. 형제간이라도 ‘맛있는 것’을 놓고는 진정한 양보가 어렵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권력의 세계에서 양보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리라. 결국에는 ‘내가 먼저’라는 욕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비관주의가 그 밑에 깔려 있다.



이익-손해의 관점에서,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을 우리는 ‘현실’ 정치라고 부른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계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정치의 전부로 안다. 함께 나누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따위는 ‘이상’ 정치라고 칭한다. 이것은 이상(理想)이기도 하지만, 이상(異常)한 정치이기도 하다. 이상한 까닭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익을 탐하는 존재이며, 누구나 원하는 것을 차지하려 들기 때문에 싸움이 필연적이라는 비관주의가 전제되어 있다.



안철수 후보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며 나섰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이 ‘좋은 사람 또 하나 망치겠다’며 염려했던 것도 정치세계를 야합과 모리의 세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단일화 합의를 두고 일각에서 야합, 꼼수, 눈속임이라며 비난이 터져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실정치적 관점에서 ‘합의’란 나와 너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타산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는 진정성이니 마음이니 가치니 하는 질적 차원은 부재한다. ‘옳다’ ‘그르다’라는 도덕적 판단도 설 자리가 없다.



7개항의 합의문을 읽으면서 눈길을 끈 것은 네 번째 항목이다. “단일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 유리함과 불리함을 따지지 않고”라는 대목이 특별히 가슴에 닿는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음이란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정치를 이익·손해의 차원이 아니라 의·불의의 차원에서 사고하겠다는 선언이다. 문득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이 될 것을 가져오셨냐!”고 인사말을 던지는 양혜왕에게, 하필왈리(何必曰利)라, “정치가라면서 하필이면 이익을 논하시냐!”라던 맹자의 공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불리가 이익이든 권력이든 외부의 가치를 두고 다투는 경쟁을 전제한다면, 의·불의는 ‘옳다’ ‘그르다’는 가치판단이므로 마음의 문제가 된다. 사람의 육신은 먹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 이·불리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만으로 이뤄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육신마저도 마음이 동해야 움직이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인식이다. 연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였던 것은 우리 사회에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절실하다는 방증이다.



사람다운 정치의 동력은 정의를 세우는 데서 나온다. 안철수의 ‘새로운 정치’와 문재인의 ‘공적 가치에 대한 지향’이 합의하는 지점이 이쯤일 것이라고 본다. 분명한 사실은 정치가 권력투쟁이기만 해서는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다운 세상은 사람들 마음속에 든 정의감을 바탕으로 수립되고, 또 그것을 동력으로 형성해간다. 이심전심이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든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들은 정치에 있어 마음의 결정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미 정치의 한 발은 마음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여태껏 우리는 증오와 질시, 경쟁과 투쟁을 현실정치라는 말로 묵인해왔다.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것을 정치의 전부라고 알고 감내해왔다. 그러나 정치란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기술이기도 하다. ‘이·불리를 따지지 않겠노라’는 합의문이 결국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한 문장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싹을 발견한다.



이것은 나의 희망이다. 희망을 뜻하는 한자어 희(希)는 ‘드물다’는 뜻도 갖고 있다. 즉 희망은 바람이면서, 희박한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물들 가운데 오로지 사람만이 희망을 품는다. 인류의 역사는 희망을 건져올려 그것을 상식으로, 또 일상으로 만들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 ‘이·불리를 따지지 않는다’는 짧은 문장 속에서 정의로운 세상에의 희망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사람다운 정치를 전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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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훈 2012-11-09 13:55:32
답글

정말 좋은 글입니다. 이제는 유권자가 두 후보의 노력에 화답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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