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에 볼보 트레일러 트럭(트랙터라고 부릅니다만)을 운영하시는 최모 회원님의
사연을 읽다보니 제 군대 시절이 떠올라서 한 줄 올려볼까 합니다. 중화물 견인용
트럭에 20피트, 40피트짜리 트레일러, 혹은 중장비용 로우베드 트레일러를 끌고
전국을 떠도는 직업이 얼핏 던져주는 나름 낭만적인 면에도 기웃거려보긴 했지만,
트럭과 화물야적장이 삶의 현장인 기사님들의 입장이 뭐 그리 녹록하겠습니까....
* 군바리 생활 배경 이야기
83년 1월말에 카투사 시험 결과발표가 나자마자 2월 2일 입대, 논산 27연대에서
공수, 전경 애들과 함께 6주간을 박박 기면서, 상대적 차별대우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 자식들은 훈련소만 벗어나면 천국으로 갈 놈들이니 더 쎄게 굴렷!!'
아마 요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시절은 한겨울이 어찌나 길기도
하던지... 3월달까지 수시로 훈련장을 뒤덮은 눈밭을 뒹굴던 춥고 배고픈 훈련병
신분에서 마침내 벗고나, 포로수용소나 진배없던 수용연대에서 빌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야간기차에 몸을 싣고 평택 캠프 험프리즈의 카투사 교육대에
입소했습니다. 2주간 기본교육 후 어울리지도 않는 영어시험 또 보고 해서...
자대배치를 받았던게 제19 지원사(19th Support) 69수송대대였습니다.
운짱으로 가는 지름길을 탄거죠.
대구 사령부 내려가서 신고하고, 바로 왜관 캠프 캐롤에 있던 운전교육대에 입소
하긴 했는데, 3주간의 교육일정이 앞 기수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2주 가량을 허송
세월로 놀고먹다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론교육과 헬기장
올라가서 트럭 대가리로 전진후진... 다들 핸들이라고는 잡아본 적도 없던 이십여
명의 동기들은 운전기초를 커다란 트레일러용 트럭으로 시작한거죠.
그런 무지랭이들을 운전교관들이 조수석에 태우고 왕복 4차선의 경부고속도로에
데리고 나간건 불과 1주일 뒤. 20피트짜리 빈 트레일러 끌고 고속도로의 왜관-
김천 사이 일정 구간을 오전-오후 두 차레에 걸쳐 실제로 운전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은 화물을 실은 트레일러로 같은 운전훈련을 일주일인가 하고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한산하던 경부고속도로였으니 그게 가능했지, 요즘 같아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죠.
평택의 60 수송중대에 배치되어 나름 고달픈 쫄따구 운짱질 조수노릇을 시작하던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가던 중, 작대기 두 개가 제법 익숙해질 무렵에 소대장
역할을 맡고있던 흑인중사 녀석이 얼마나 전횡을 부리던지 동기녀석과 둘이서
말다툼을 시작했다가 제가 좀 오버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넘에게 완전히 찍혀버린
통에 결국 동두천 파견분대로 쫒겨나 버리고 말았던겁니다.
더블백 하나 달랑 싸서 정든 동기녀석들 뒤로 하고 들어간 파견대 생활도 뭐 할만
하더군요. 널찍한 야드에 자그만 사무실 하나, 숙소 한 동으로 구성된 파견대는
부산항이나 오산AB에서 공수되어온 온갖 화물 트레일러가 이리저리 릴레이를 거쳐
마지막 배달을 앞두고 모여드는 최종 기착지였습니다. 물론, 평택에서 화물을 달고
올라왔다가 빈 트레일러나, 때로는 APC 등 미국 송환용 화물을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 내려가던 동기녀석들과는 자주 해후할 수 있었던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할까요.
제대 말년 무렵, 춘천가던 도중 화도휴게소에서....
길가에서 어떤 노인이 끌고가던 리어카를 툭 치고 가는 바람에 사람이 다치는 인사
사고를 일으켜 졸지에 두어달 남한산성 관광까지 다녀왔던 동기녀석과 뜨겁게
해후하던 그 날을 특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놈 두세 명을 포함해 고작 예닐곱 명 정도가 근무하던 파견대 생활은 따지고 보면
탱자탱자거리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주 5일,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습관이 몸에 밴 시절이기도 하고요. 지겨울 정도로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캠프 케이시 내에 있던 3곳의 영화관 순례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말이죠. 물론, 그 덕에 '터미네이터'를 포함해 자막도 없는 미개봉 미국영화 대략
300편 이상은 봤네요.
아마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있던 때였던가.... 팀 스피리트 훈련 지원을 나가게
됐습니다. 연천 부근의 어느 지점에 에어 드롭 훈련이 있었던 겁니다. 지정된
시각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물 수송기가 공중에서 각종 화물과 보급품을 낙하시키고
그것을 제대로 회수-보급하는 훈련이죠.
출동!!
T.S. 지원 나갔다가 만났던 황당한 사고
막 봄 기운이 느껴질락 말락하던 어느 오후, 지정된 장소에 빈 트레일러 끌고 갔더니
이리저리 논밭이 널린 널찍한 개괄지에는 항공기와 교신할 미군들이 웅성거리고 있고
카투사 수송병이 모는 트레일러 외에도 여러 대의 집차와 트럭 등이 대기하고 있더
군요.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드디어 저 멀리서 우웅--- 소리가 들리면서 수송기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개괄지 군데군데에는 붉은 색 연막신호가 피어오르고, 나름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젖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몇 백 미터 상공에서 낙하산에 매달린 화물이 툭, 툭 투척되는데... 이넘의
자식들이 얼마나 허술한지 표시된 장소에 제대로 떨어지는건 얼마 되지도 않고 남의
빈 논밭 구석구석에 처박히는게 부지기수더군요. 옆에서 함께 구경하고 있던 민간인
기사 한 사람이 혀를 찹니다.
"저 자식들, 실력 꼴 좀 봐... 한국군이 하면 백발백중인데 말야..."
나름 평탄한 장소에 화물이 떨어지면 즉각 해체해서 실어버리고 떠나면 되는데
얼었다가 풀린 논밭 여기저기에 찝차며, 각종 군수장비며.. 들이 처박혀 버렸으니
이것들을 회수하는 게 또 상당한 일이 되어버린겁니다. 잠시후 크레인을 매단
트럭이 달려와 논두렁을 타고 들어갔는데, 아 이놈의 차가 푸석푸석한 논에 바퀴가
처박혀 옴짝달싹을 안하는겁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런 꼴 나기 십상이다.
해서.. 다시 좀 있다가 이번에 커다란 견인장치를 단 레커트럭이 달려옵니다.
그런데 그놈의 레커트럭조차 논바닥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비비적댑니다. 또 다른
레커트럭이 달려온다 어쩐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상황이 정리되니 해는 뉘엿
뉘엿 저물어가고,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 없습니다.
볼이 빨갛게 얼어서 추운 표정이 역력한 노랑머리 여군 소위가 화물처리를 위해
우왕좌왕하는걸 보니 제법 이쁘게 생기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하고 해서 운짱 주제에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안되는 영어로 괜시리 도와준답시고 설치다가... 내가
끌고간 트레일러도 겨우 상차를 마쳤습니다. 트레일러에 실은건 고작 화물받침용
으로 썼던 두툼한 알루미늄 강판들이었지만...
드디어 미군 찝차가 선도하는대로 트럭을 몰고 뒤쫒아 출발합니다. 그런데, 낙하
화물이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아서 두어 시간을 허비하느라 바람부는 벌판에서 몇
시간을 헤매던 녀석들이 서둘러 귀대하려는 욕심에 뒤쫒아가는 트레일러는 생각도
않고 속도를 올려 내빼는겁니다.
"아... 자식들, 뒤게 서두르고 있네..."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들도 배고픈 인간인지라 가능한대로 나도 속도를
올려 보조를 맞춰주려고 했지요. 한참을 달려갔더니 어느 자그만 동네가 나오고
그 동네 너머를 둑으로 차단한 탱크 방어벽이 나옵니다. 차 두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 터널처럼 그 아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겁니다.
찝차는 바쁘다고 휙 통과해버리는데, 20피트짜리 트레일러를 매단 트럭은 한 방에
쉽사리 돌아들어가기 애매한 각도입니다. 공터가 열려있으니 최대한 크게 트럭을
회전시켜 트레일러 위치를 확보합니다만, 좀 애매합니다.
역시나, 트럭 몸체에 이끌려오는 트레일러의 뒷부분이 콘크리트 방호벽 모서리에
긁히는 소리가 납니다. 나름 신경을 기울려 조심조심 터널로 진입하는 상황이었지만
후진을 해서라도 좀 더 크게 돌아야했던 것이죠. 벽 모서리에 걸린 부분은 트레일러
꽁무니 약 2미터 가량... 대충 각도를 보아한즉 힘으로 땡겨버리면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요행수를 바라고 우격다짐 엑셀을 밟은 결과는 허망
했습니다. 화물이 트레일러 앞부분에 실려있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트레일러
꽁무니는 그만 벽을 드드그 긁으며 공중으로 떠버리고 말았고, 이젠 앞으로도 뒤로도
꼼짝달싹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이놈의 트럭이 왜 안쫒아 오나 하고 되돌아온 미군 녀석들, 30센티 허공에 떠서
걸려버린 트레일러를 보고는 망연자실합니다. 저로서는 이걸 대체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머리나 긁적이고 있을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는데, 하릴없는 동네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그러더니 근처에 골재야적장이 있고, 그곳에 대형장비가
있다는겁니다.
조수석에 있던 후배녀석과 그곳을 찾아가서 젊은 사장인지 누군지에게 사정을
했지요. 문제는 수고비를 달라는데, 그놈의 돈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양담배며
씨레이션 꼬불쳐둔게 좀 있다'고 무조건 꼬셨습니다. 군바리 둘이서 사정을 하는
꼴이 딱해보이기도 했을 이 양반, 잠시 후에 대형 포크레인을 끌고 나왔습니다.
일도 아니더군요. 커다란 포크레인을 트레일러 밑에 넣어서 쓱 하니 들어서 옆으로
툭 내려놓으니 금새 상황 종료. 하지만, 가난한 카투사 군바리들이 그 양반에게
건내준 건 담배 두 갑에 씨레이션 투 박스 정도나 되었으려나....
아마도 지금은 큰 자재회사를 하고 있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분의 수고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총총... ^^
트레일러 앞에 갑자기 끼어들거나 해서 급브레이크를 밟을 경우, 잘못하면 이런 꼴이
생길 수도 있다. 일명 재크 나이프 현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