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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가 정책 구상을 발표했다. 소위 7대 정책 비전은 모두 좋은 말들이고, 나도 이 나라가 그 말처럼 바뀌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말로 하기는 쉬워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아직 대통령도 아닌 사람이 뭘 잘 해보겠다고 하는 정도의 얘기를 놓고서 "말처럼 되기는 어렵다"고 시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비전들을 실제로 실현하려면 구체적인 정책 구상이 앞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인데, 이 역시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현 시점에서 굳이 일일이 파고들어가지는 않는다.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국회의 지위를 존중하는 대목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때라든지 남북한 간에 중요한 합의가 있을 때, 국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하겠다고 말한 대목이다. 장기적인 정치 개혁의 방향으로서 나는 이러한 발상을 적극 환영한다. 하지만 임기 5년의 대통령직을 그가 맡았다고 할 때, 국회의 동의를 존중한다는 말은 사실상 과반수인 새누리당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되는데, 이런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가 패배하면 새누리당은 당의 존립과 관련해서 굉장한 내홍에 휩싸일 것이다. 당이 깨질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과반수 국회 권력을 중심으로 오히려 똘똘 뭉칠 가능성이 더 크다. 재벌, 보수 언론, 관료, 군부, 법조계, 학계 등에 넓고 두껍게 분포하는 기득권 동맹을 배경으로, 대통령의 개혁 시도를 사사건건 좌절시킬 확률이 현실적으로 훨씬 높다. 민주당 의원들과 진보 계열의 의원들이 모두 안철수를 지지하더라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이 모두 안철수를 지지할 보장도 없다.
새로운 개혁 정책만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지난 일들에 관한 진상 발굴과 재평가라는 과제로 들어가면 새누리당은 결사적으로 저항하게 될 것이다. 천안함 침몰의 원인, 장준하 암살 의혹, 4대강 사업과 관련된 온갖 비리 의혹, 이명박 정부가 언론을 장악한 과정의 속사정 등, 이런 문제들의 진상을 파악하는 일은 안철수가 생각하는 "상식"만 가지고 해결될 수가 없다. 애당초 상식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의 상식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안철수는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 조직을 맡아서 이끌어갈 사람들을 어떻게 뽑아야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될까? 어떤 공직자의 무슨 비리를 수사할지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것일까? 안철수의 "상식"과 부합하는 인선과 결정이 내려진다면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것인가 대통령에게 종속된 것인가?
공직자비리수사처가 안철수의 "상식"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대통령으로부터는 확실히 독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지금 안철수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공직자비리수사처가 법조계 내부의 "관행" 또는 조작된 여론의 "통념"에 따라 휘둘린다면, 안철수의 "상식"은 어떻게 반응하려나?
안철수가 스스로 대통령의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된 데에는 성공한 CEO로서 경험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가의 경영을 기업 경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착각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기업의 경우에는 자신의 "상식"과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회사에서 쫓아내거나 거래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반면에 한 나라의 제도와 정책을 관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나와는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상식"만이 유일한 상식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안철수는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으로서는 실패할 것이 뻔하다. 세종이 세제 개혁안을 내놓고 조야의 합의를 얻어내기까지 17년이 걸렸다. 태종 이방원이었다면 17년은커녕 1년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뜻을 무력으로 관철했을 것이다.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의 입지가 경주로 결정되기까지 약 17년이 걸렸다. 반면에 이명박이 4대강 사업을 결정하는 데에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상태이다. 합의를 기다리지 않으면 강압으로 대통령의 뜻을 관철해야 하고, 합의를 기다리기로 하면 5년으로는 턱도 없는 것이다.
안철수 아니라 누구라도, 한국 정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새 시대를 열겠다는 꿈은 좋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라는 것은 몇 사람이 계획한다고 열리는 일이 결코 아니다. 혁명이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독차지한들 새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는 점은 히틀러와 스탈린과 김일성과 박정희의 사례를 통해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물며 임기가 5년으로 제한된 사람이 새 시대를 열겠다는 말은 어떻게 보더라도 선거용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안철수가 합의에 의한 정치를 추구하겠다는 데에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다. 단, 자기가 뜻하는 "합의"가 5000만 국민의 만장일치일 수 없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기 바란다. 한국의 국회가 생산적인 합의를 조성해내지 못하는 까닭이 국회의원들의 상식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이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임을 늦기 전에 성찰하기 바란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모두가 원하는 하나의 영원한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이익들을 시의에 따라 조정하는 과정임을 시급히 직시하기 바란다.
정치는 인생사의 모든 문제에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정치가 인생사의 모든 문제에 답을 내놓으려 들면 안 된다. 정치는 당장 결정이 필요한 일에만 답을 내놓아야 한다. 한국 정치에서 불거지고 있는 문제들 중에는 5년 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다. 그러므로 5년의 임기 동안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은 5년 안에 답을 내놓아야 할 문제에만 집중하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건강하다.
5년 안에 할 수 있는 문제라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합의를 기다린다는 식의 말장난에서 벗어나 누구와 동맹해서 어떤 이견을 묵살하고 나갈지를 정교하게 분별해야 한다. 여기에는 묵살당한 세력이 반발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에 관한 섬세한 고려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안철수가 이번에 발표한 것은 아마도 대략적인 구상으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내놓을 작정일 것이다. 다음번에는 보다 구체적이며 따라서 보다 제한적인 구상을 내놓을 수 있기 바란다. 다음번에 보다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내용을 발표할 수 있으려면,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양한 이견들 사이에서 조정력을 발휘하는 예술임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뜻하는 "상식"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상식이 있다는 사실을 지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번에도 지금 수준의 엉성한 구상밖에 내놓을 게 없다면, 새 시대를 연다는 꿈은 접는 편이 현명하다. 이는 안철수만이 아니라 문재인, 박근혜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말이다. 후보들이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정책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선거판에서 새 시대를 여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다.
"새 시대를 연다"는 간판을 역사적으로 독점하려는 과욕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세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들 사이의 경쟁이 선거를 주도한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