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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 –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역학자
한때 아시아의 용이라고 불린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네 나라중 홍콩은 영국령 이었으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세 나라가 전체주의 동원체제였는데, 그 중 싱가폴은 도시국가 이므로 논외로 하고, 실질적으로 전체주의 동원체제가 성공한 나라는 세계에서 남한과 대만뿐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저명한 정치경제 학자들은 한국과 대만이 전체주의 동원체제로 인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견해에 거의 아무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대만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이고, 성실한 민족성, 높은 교육열 덕분에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가 필리핀, 탄자니아 보다도 못살았는데 박정희 덕분에 이만큼 살게 되었다.”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찬란한 문화민족입니다. 한때 왜놈의 식민지가 되고, 또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가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 해서 어떻게 스페인에 점령되기 전까지 고대국가도 형성못한 부족국가 상태였던 필리핀, 그리고 부족국가도 아닌 씨족사회였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비교하는 것은 존엄하신 우리의 선조와,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모독한 패륜입니다.
◈ 박정희 경제지표의 허구.
대한민국의 경제를 전부 박정희가 이루어 낸 거다?? 제대로 된 경제학자에게 다 물어 봐라. 그 말에 동조하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다.
- 경제학자 강기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에 따르면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 10점, 박정희: 6점. 박정희 경제가 꼴찌였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절(1961-80)에 년 평균 8.5%의 경제성장을 기록, 국민총생산은 약 4배로 커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962년 87달러에서 1981년 791달러로 거의 열 배가 늘었다.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약 210억 달러로 늘었다. (경상대 장상환교수의 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
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은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가 노무현.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사는 나라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 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서민들의 삶]
-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 임금은 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차라리 선조가 임진왜란극복의 국방력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게 낫다. 박정희가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는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후일 전두환이 일본에 40억 달러 구걸하기에 이름)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 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불행중 약간이나마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박정희의 경제가 찬양받아야 할 일이라면 박정희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훨씬 더 찬란한 경제를 이루어 낸 독일의 히틀러와, 러시아의 스탈린, 대동강 기적을 이루어 낸 북한의 김일성(지금은 쫄딱 망했지만), 30년 이상 중국의 경제를 년 약 10%의 성장을 이루어 낸 중국의 지도자들은 더욱 찬양을 받아야 하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 강국까지 올려놓은 김대중과 노무현은 무슨 찬양을 해야 하나?? 아니면 한국의 경제거물급인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찬양 해야 하나?
박정희 정권에서 워낙 국민들을 세뇌시켜서 순진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5.16 군사 쿠테타가 발생한 1961년 이전의 대한민국을 원시사회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1961년 대한민국은 그렇게 낙후된 국가가 아니었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시점의 우리나라 세계 GDP 순위 29위일 정도로 어느 정도 발전된 나라이었다. 물론 당시 세계는 오늘날처럼 풍족한 사회가 아니어서, 이웃 일본도 끼니를 적정하고 사는 사회 이었다. 이정도면 세뇌 공작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박정희가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두환경제도 있고, 김대중, 노무현 경제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박정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말도 웃긴다. 100명의 학생 중 꼴지의 학생이 60-70등 하는 것이 쉽나? 10등의 학생이5등 하는 것이 쉽나? 개방을 하고 국제환경 등이 맞아 떨어지면 박정희가 없어도 경제는 꽃이 핀다.
러시아, 베트남, 인도, 남미의 나라들을 한 번 보시라. 캄보디아는 년 1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하기도 한다. 싱가폴, 대만, 홍콩, 일본 등은 박정희가 없어도 크게 성장했다. 우리나라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박정희 시절에 대한민국 경제사를 국민에게 안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를 정략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김대중 5년집권 + 846억$흑자 7,355 ->12,646. 신용불량자 65만 늘어난 2002년 말..265만 기록. 독재산업화 세력이 말아먹은 국가경쟁력 41위ㅡ> 29위 역대최고 기록. BK21사업으로 과학기술경쟁력 28위ㅡ> 12위까지 상승시킴.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 세계4위 외채국 만든 한국을 국가부도 걱정없는 1200억 달러 세계 4위 외환보유국 만듬.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이 말아먹은 10단계 추락한 국가경쟁력,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상승시킴. 1999년 9월부로 대한민국을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만듬.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 경제학자 최용식씨 -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 였다. - 고려대 총장 이필상씨 -
1969년 외환위기가 왔다. (국내 상장기업 45%가 부실기업) 1974년 국가부도를 맞았다. 1979년 외환위기가 왔다. 1980년 외환위기는 계속됐다. 전두환이 일본에게 40억 달러 구걸해와 빚으로 빚의 이자나마 간신히 갚는 상황이었지만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박정희·전두환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이라 신격화만 했다. 1979년 박정희는 180억 달러, 세계4위 채무국, GDP 대비 55%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고, 1985년 전두환은 550억 달러, 세계1위 채무국, GDP 대비 250%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다. 언론은 이때 역시 국가부도 위기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에 1974년 이후 두번째 국가부도를 맞았다. 민주화 시대에도 언론은 외환 보유고가 38억 달러로 고갈되었지만 국가부도 하루 전날에도 국민들에게 한국경제는 문제없다고 장담 했다. 이랬던 언론이 2000년 2/4분기 건국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에 입성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2년말 1200억 달러로 세계 4위 외환보유국에 입성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하고, 2006년 대외 국가채무가 GDP 대비 30%로 건실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6년말 대외 순채권이 900억 달러를 돌파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언론과 국민은 박정희·전두환 시절이 좋았단다. 이들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단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빚더미 부도열차에 마지막에 탑승해 역시 무능과 부패 속에 국가부도 시킨 김영삼. 저들에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착취당하고 세뇌 당한 50년 세월이 원통하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역사의 진실 앞에 입다물고, 지역주의와 부패의 늪에 빠져있는 한국경제학자들은 반드시 단죄 받아야 한다.
나는 70년대 초반 군대생활을 했는데 훈련소에서 동초근무를 선 후 새벽 2-3시경 잠자리에 들어서도 너무나 배가고파 뜬 눈으로 잠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당시 쌀과 보리를 합쳐 1인당 하루 규정량이 732gr이었지만 정작 배식되는 밥은 몹시 적었고 부식이래야 콩나물국에 김치 몇 쪽이었다. 1주일에 한 번 돼지고기 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계덩이만 몇 개 떠 있곤 했다. 실무에 가서도 오히려 훈련소 생각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전방 오지일수록 정도는 더욱 심했다. 요즘 군대에서 배곯는 병사가 있는가? 요즘 우리생활 수준이 어떤가? 물론 요즘 취직이 안 되어 고통을 당하고 아직도 달동네에서 적은 수입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지만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차를 2대 이상 가진 집이 많고,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냉난방시설 틀어놓고, 웬만한 가정에는 컴퓨터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식구마다 휴대폰을 차고 다니는 세상이 아닌가? 만약 요즘 소득수준으로 13평짜리 연탄 아파트에 차도 안 굴리고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면 얼마나 풍족하고 여유로울가? 박정희 시절 작은 집에서 살고 차도 안 굴리고 밤낮으로 일만 하고 살았으니 먹고, 입고, 애들 학비 외에는 돈 들어 갈 일이 없었으니 불편만 감수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삶이 충족된 생활 할수 있다. 자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도 박정희 경제 환상속에 사시는지요.
박정희가 고도의 경제 발전 이루었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차라리 선조가 임진왜란극복의 국방력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게 낫다. 어느 사이트 클럽이던 박정희에 대한 칭찬 의 글 올리면 그냥 가만있지만 이렇게 박정희에 대한 사실적인 글 올리면 강퇴 내지 삭제가 된다. 거의가 박정희에 대해서 세뇌되고 박정희에 길들여졌다고 할까. 아니면 조중동에 길들여졌다고할까. 세뇌 되었다고 할까. 날 이상하게 좌파이니 불순분자이니 하는 사람들 사실 바로 알고 나서 그런 말 하세요. 이런 사실적인 글 올리는데 좌파라고하면 난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 올바른 역사 인식 위해서 좌파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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