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신의를 전부는 못보고 재방송으로 5-6회를 대략 보았는데
최영의 무술실력이 실제로 드라마처럼 고수였는지는 모르지만 최영의
활약상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터무니 없이 과장된 부분은 제외하더라도 최영이 일생동안 치룬 전쟁을 보면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짐작이 갈겁니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 그 공으로 우달치
1352년(공민왕 1)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 13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그해 원(元)나라에서 남정군(南征軍)을 요청하자, 원나라의 고우(高郵)·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평하고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영토수복을 꾀할 때 서북면병마사 인당(印璫), 부사(副使) 신순(辛珣)·유홍(兪弘)·최부개(崔夫介)와 더불어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략하여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
1357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평양)을 함락시키자 서북면병마사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1361년 홍건적이 재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고 수도를 수복
1363년 김용(金鏞)이 사주한 흥왕사(興王寺)의 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해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 명과 함께 쳐들어오자 도순위사(都巡慰使)에 임명되어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정주(定州) 달천(獺川)에서 섬멸.
이어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보내 격퇴시킨 뒤 공민왕으로부터 국청사(國淸寺)에서 개선주연(凱旋酒宴)을 받고. 다음해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격퇴
1376년에 왜구가 삼남지방을 침입해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연산(連山)에서 참패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자원하여 운봉(雲峰)의 홍산(鴻山) 전투에서 적을 섬멸 1377년 육도도통사·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서강(西江)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1378년 다시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지금의 豊德)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무찌름...
-다음 백과사전에서 요약-
그런데 고려말의 나라 사정을 보면 그야말로 비참의 극치를 달리네요
매년 이어지는 흉년 질병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왜구의 침입 홍건적의 침입 원나라와 명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이중으로
압박을 받으면서 나라가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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