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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도 비웃을 '은마아파트 경고문'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살 수 있다면 애초부터 무리를 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상대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이런 '사회적 본능'에서 도덕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무리를 짓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것은 고귀한 이타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남고 남들 속에서 평온하게 지내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드 발은 침팬지조차 배려와 협력의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지난 해 말 테드 강연에서 100년 가까이 된 낡은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우리에 갇힌 침팬지 두 마리가 밧줄을 하나찍 쥐고 열심히 당기는 장면이 담겨 있다. 동아줄은 우리 밖에 놓인 과일상자 양모서리에 연결돼 있는데, 꽤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혼자서는 끌어 당길 수 없다. 침팬지는 힘을 합쳐 줄을 모두 당긴 후 즐겁게 음식을 먹는다.
더 흥미로운 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배가 부른 경우다. 배고픈 놈이 힘껏 줄을 당겨 보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는 배부른 동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함께 밧줄을 당긴다. 배부른 놈이 가끔씩 한눈을 팔긴 하지만, 결국 끝까지 힘을 보태 준다. 하지만 상자가 코 앞에 도착했어도 배부른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주린 놈이 과일을 독차지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배부른 침팬지가 왜 도움을 베풀까? 어차피 자신은 노동의 결실을 얻지 못할 텐데. 간단하다. 자신도 언젠가 배가 고파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자신도 동료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은마아파트측의 항변은 이렇다. "배달원들이 엘리베이터를 쓰기 때문에 새벽에 교회에 가거나 출근하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것이다. '불편'을 호소했다는 걸로 보아, 그 14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승강기를 짜증스레 기다리기보다 걸어 내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배달원들에게 승강기를 타지 말라고 한다. 무거운 음식 박스와 신문더미를 든 채 아파트를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은마아파트 49층 재개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더 기가 막힌 건 "새벽에 교회에 가는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이야기였다. 새벽기도에 참석할 만큼 신실한 교인들은 교회에 앉아 무슨 기도를 하고 무슨 은혜를 받았을까. 예수라면 엘리베이터를 배달원에게 내 주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셨을 것이다. "네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공감의 원칙은 예수가 말씀하신 이 황금률에도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