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책,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아침에 저에게로 전달돼
왔습니다. 514 페이지짜리 페이퍼백의 원서입니다. 뭐, 제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굳이
한글판을, 그것도 2권으로 출판되어 배 이상의 가격을 주고 이 책을 구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격이 싼 원서를 그냥 재미삼아 구입한겁니다.
책 뒤의 가격표에는 미국 15.95달러, 캐나다 17.95달러로 표시되어 있는데, 서점의 판매가격은
배송비 포함해서 1만920원. 한글판의 반값도 안되네요. 어쨌건 이걸 다 읽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 모르겠지만, 출퇴근 버스 안에서 뒤적거릴 생각입니다.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니 어쩌니 하면서 노골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난리 블루스를
치긴했지만, 이 책은 실지로 싸구려 포르노는 아닙니다. 소재가 좀 파격적이라는 정도죠.
오늘날 명작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도 로렌스가 1928년 자비출판한
이후 무려 30년이 넘도록 영국에서 대놓고 출판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음란하다는
평 때문이었지요. 1960년 펭귄사가 정식으로 책을 내놨지만, 음란저작물법 위반으로 당국에
고발당하는 등 한 바탕 곤욕을 치렀죠.
무려 80하고도 수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영국에서 돌풍의 화제를 몰고 등장한 성애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과연 그 정도의 파격을 넘나들면서도 영국이나 미국같은 출판 선진국
독자들로부터 그처럼 사랑받을 만큼 문학적 가치를 길이 누릴 수 있는 작품이 될런지는 물론
두고두고 지켜봐야겠습니다만....
아무튼 맨 첫 장면은 주인공 아나스타샤가 자신에게 예정없이 맡겨진 일거리 때문에 불평하면서
구겨진 머리를 억지로 정리하려고 빗질에 애쓰는 모습입니다. 대충 몇 단락 번역해 봤습니다.
물론, 아주아주 쓸데없는 짓이죠. 이미 며칠 전에 시공사가 한글판을 초판 3만부나 뿌려놓은
상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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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절감으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망할 놈의 머리카락 - 대체 말을
안들어먹어, 그리고 망할 캐서린 캐바나, 괜히 아파가지고 이런 잡일을 시켜먹다니.
다음 주에 있는 시험준비에 코를 박아야할 판에 나는 지금 말 안들어먹는 머리카락과 이러고
있으니. '머리를 완전히 말리고 잤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을 주문처럼 주절대면서
다시 한번 빗질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화가 나서 눈알을 굴려가며 낯빛이 창백한
갈색머리의 여자애를 노려봤다. 얼굴에 비해 별나게 커보이는 눈은 나를 되노려보고 있었다.
제 멋대로인 이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버리는 게 그나마 봐줄만하게 만들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룸메이트인 케이트는 그 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면 오늘을 골라 감기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녀는 나로서는 생판 들어본 적도 없는 어떤 대그룹 재벌과 학교신문에 게재할 인터뷰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그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나는 마지막
시험 준비와 아직 마치지 못한 에세이 숙제 때문에 오늘 오후를 공부로 보낼 계획이었지만
다 틀어지고 말았다. 오늘 165마일이나 떨어진 시애틀 시내로 나가 그레이 엔터프라이즈
홀딩스의 열정적인 CEO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 대학 출신으로서는 예외적인 기업가이며
큰손 기부자인 그의 시간은 대단히 -내가 허비할 시간보다 훨씬 더- 소중하지만 그는
기꺼이 케이트에게 인터뷰를 허락해준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케이트가 말했었다.
케이트의 과외활동에 저주가 있으라.
케이트는 거실 소파에 널부러져 있었다.
"안나, 미안해. 이번 인터뷰 잡는데 9개월이나 걸렸어. 스케줄을 다시 맞추려면 6개월
뒤라야 된다는데, 그때쯤이면 우린 둘 다 졸업한 다음일테니 말이야. 편집장 입장에서
이번 건을 날려보낼 수 없어. 부탁해."
케이트는 목이 부어 거친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멋진 모습을 잃지 않았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금발은
단정하고 초록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눈자위가 충혈되고 눈물이
어른거렸지만 말이다. 반갑지 않은 동정심이 찌릿 와닿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알았어, 간다니깐, 케이트. 침대에 가서 누워. 나이퀼을 줄까, 아니면 타이레놀을 줄까?"
"나이퀼로 줘. 질문지하고 디지털 녹음기 여깄어. 여길 누르면 돼. 노트를 해야돼.
나중에 내가 옮겨쓸테니."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우물거렸지만,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 그 질문이면 돼. 자, 빨리 가. 먼길 운전해야 되잖아. 늦으면 정말 안돼."
"알았어, 갈게. 침대가서 누워. 스프 좀 만들어뒀으니까 나중에 데워 먹어." 애정이
담뿍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트, 너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도 할 수 있지.
"그럴게. 행운을 빌어. 그리고 고마워. 아나, 항상 그렇지만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배낭을 짊어지고, 그녀에게 쓴웃음을 던지며 문을 열고 나가 차로 향했다. 케이트에게 설득되어
이렇게까지 하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그때 케이트는 세상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뛰어난 기자가 될거야. 명료하고, 강하고, 설득력 있고,
논쟁에도 뛰어나고, 아름답지. 그런 그녀가 정말이지 소중한 나의 친구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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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세 단락이지만, 번역이란게 - 그것도 남앞에 드러내놓기 위한 - 얼마나 어렵고 신경쓰이는
작업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정식 번역료를 받고 대규모 출판이 예정된 작업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겠죠.
번역이란 단순히 영문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의 정확한
의중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한국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독자들이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 않고 원문의 향기를 그대로 맛보게 하는 변화작업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섯부른
오역이나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 이 세상의 모든 번역가들에게 축복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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