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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집무실 금고, 박근혜에게 털렸다”
[서평] '태자마마와 유신공주'… 조사단이 방문했을 때 금고는 이미 비어있었다
박근혜의 아킬레스 건 세 가지가 있다고들 한다. 첫째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동생 박근령이고 둘째는 박정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김재규고 셋째는 후견인 역할을 했던 최태민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을 둘러싼 루머는 단순한 가십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기록돼 있다. 최태민은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도 등장한다. 김재규는 최태민의 부정과 박근혜가 그를 감쌌던 것이 10·26 혁명의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 쓴 ‘한국 현대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박근혜는 육영수의 사망 이후 최태민에게 의존했다. 박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이 모두 잘렸고 최태민이 추천한 사람이 박근혜의 비서가 됐다. 박근혜는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최태민은 자신을 ‘태자마마’라고 불렀다. 최태민이 뇌물을 받고 이권에 개입한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최태민은 목사라고 불렸지만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은 있지만 승려로 활동하기도 했고 영세교 교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세교는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태민은 총재로 취임한다. 대한구국선교단은 이듬해 구국여성봉사단으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박근혜는 이 단체에 명예총재로 이름을 얹는데 최태민은 ‘퍼스트레이디’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으로 여러 기록이 전하고 있다.
박근혜는 199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최태민이)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느껴서 그분과 같이 일하게 됐다”고 말한 적 있다. 조선일보 2002년 인터뷰에서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식 기독교 목사였고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면 상대도 안 했을 것”이라며 “나도 알아볼 것 다 알아보고 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최태민은 12·12 직후 사기 및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돼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받는다.
김재규의 항소 이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 법원에 낸 항소이유 보충서에는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친국까지 시행했고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했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다”는 대목도 주목된다.
박근혜는 최태민과의 관계를 부인한다.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퇴임 기자회견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최태민의 비서였던 정윤회가 최태민이 죽고 난 뒤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박근혜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윤회는 최태민의 사위다.
2007년 오마이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박근령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같은 시기 박지만은 우먼센스와 인터뷰에서 ”큰 누나와 최씨와의 관계를 그냥 두는 것은 큰 누나를 욕먹게 하고 부모님께도 누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 떼어놓으려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태자마마와 유신공주’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책이다.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증언과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실린 자료의 상당 부분이 보수논객 조갑제의 홈페이지가 출처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박근혜와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는 이미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을 기록한 역사적 인물이다. 우리는 박근혜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최태민 비리 의혹에 대한 박근혜의 답변은 늘 같았다. “그가 잘못한 게 있었으면 벌써 처벌 받았을 텐데 그런 게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박지만의 저축은행 비리 연루 의혹이 제기되자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걸로 끝난 것 아니냐”고 답변한 적 있다. 올케 서향희의 도피 의혹을 묻는 질문에는 "너무 관심을 받아 올케에게 미안하다"면서 "알아보니 검찰에서 문제가 된 게 없다고 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최태민과의 관계는 사생활의 문제로 남겨둘 수 있지만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의 청와대 생활과 청와대를 나온 이후의 행적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 많다. 최근 “전두환 오빠가 박근혜에게 불법통치자금 (현재 물가 기준으로) 수백억원을 건넸다”는 미디어오늘 기사가 논란이 된 바 있지만 이는 기록으로 충분히 뒷받침된다. 흥미로운 대목은 박근혜가 챙긴 돈이 과연 6억원 뿐이었느냐는 데 있다.
조갑제의 기록에 따르면 10·26 직후 조사단이 청와대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금고는 이미 비어있었다. 11월14일 조사단이 금고를 열었을 때 금고엔 단 한 푼도 없었다. 조갑제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26 이후에는 집무실을 봉인해버렸고 공식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이 방에 들어간 것은 박근혜가 처음이다. 문제는 박근혜가 가져간 대통령의 용돈이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용돈을 서민의 용돈과 같은 수치감각으로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두환이 9억5000만원을 꺼내 6억원을 박근혜에게 건넸다는 금고는 집무실 금고가 아니라 비서실 금고였다. 집무실에는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사실 확인은 안 됐다. “수십억 원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이 억측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는 이계원 비서실장의 증언도 있었고 “박 대통령이 많은 돈을 쌓아두는 성격이 아니라 큰 돈이 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통령 부속실 직원의 증언도 있었다. `
박근혜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국장이 끝난 11월 초순에 아버님 집무실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집무실 중에는 신당동 집으로 가져간 것도 있다. 태백계획이란 군사관계 보고서는 비서실에 인계한 기억이 난다.” 조갑제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 금고에 든 돈은 그 과다에 관계없이 국가소유가 되었어야 했다. 그 돈과 집무실의 서류들이 박근혜에 의해 반출된 것은 앞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김계원의 증언은 이렇다. “10월27일 새벽 대통령 집무실이 어떻게 돼 있는지 가봤더니 잠겨 있었고 열쇠를 박근혜가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학봉 부속실장의 증언도 같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희들은 집무실 열쇠와 금고 열쇠를 본관 경호원에게 맡겼습니다. 박 대통령은 별도로 금고와 서랍 열쇠를 갖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10월26일 이후 근혜씨만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태자마마와 유신공주’에 따르면 박근혜 남매의 재산은 영남대학교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를 통해 증식됐다. 박근혜가 대선 주자가 되면 박근혜가 1979년 청와대를 떠난 뒤 1997년 국회에 입성하기까지 숨겨진 18년과 재산형성 과정에 대해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최태민이 박근혜의 자산관리인이었다는 소문도 많았지만 박근혜는 부인하고 있다. 최근 한겨레 보도에서는 최태민 자녀들의 거액의 부동산이 거론되기도 했다.
영남대는 1967년 청구대와 대구대가 통합돼 설립된 학교다. 경주 최부자집 소유였던 청구대는 회계비리 무마용으로, 삼성그룹 소유였던 대구대는 사카린 밀수사건 무마용으로 정부에 헌납된다. 정부에 헌납했으니 정부 소유가 돼야 맞는데 1980년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의 측근들이 재단 이사회를 독식하게 된다. 개정된 정관에는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대구대 설립자 최준의 후손들은 2007년 “박근혜가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강제 매입한 학교 부지를 매각해 막대한 차액을 챙겼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 경쟁자였던 이명박 후보 쪽에서 배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정부에 헌납된 영남대가 사유화된 과정은 석연치 않다. 출근 조차 하지 않은 박근혜가 챙겨간 판공비와 출장비 등도 논란이 된 바 있다.
육영재단도 ‘장물취득’의 혐의가 짙다. 1969년 육영수가 출연한 1000만원이 기본 자산인데 설립 열흘 만에 2억6364만원으로 자산이 불어난다. 기부감과 찬조금, 정부보조금이 쏟아져 들어온 덕분이다. 박근혜가 1982년부터 이사장을 지냈고 1900년부터는 박근령이 이사장을 지냈다. 육영재단에도 최태민의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전횡을 휘둘렀다. 박근령이 노태우에게 언니가 속고 있다며 탄원서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정수장학회의 역사도 파란만장하다.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던 사업가 김지태가 석방의 대가로 문화방송과 부산일보, 부일장학회 등을 강제로 헌납 당했고 부일장학회가 5·16장학회가 되는데 그게 정수장학회의 전신이다. 박근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이사장을 맡았고 현재는 박정희 비서관 출신인 최필립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근혜는 “이미 사회에 환원했는데 어떻게 또 환원하라는 말이냐”는 입장이다.
정수장학회의 자산은 200억원을 웃도는 현금과 MBC와 부산일보 주식, 경향신문 부지 등을 포함하면 수십조원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에 밉보인 경향신문이 1965년 강제 파산된 뒤 1974년 MBC에 흡수합병, 정수장학회 부지로 함께 이사했다가 1981년 MBC와 계열분리 되면서 정수장학회 부지에 남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경향신문은 정동 사옥의 부지임대료로 월 3400만원을 내고 있다.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이사장 재직 시절 2억53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상근직원인데도 출근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논란이 됐지만 공익 재단의 이사장의 연봉으로는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박근혜의 연봉은 100명 이상의 대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줄 수 있는 돈이었다. 고 김지태 유족들은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냈다가 패소한 바 있다. 유족들은 정수장학회의 사회환원을 요구하고 있다.
태자마마와 유신공주 / 김수길 지음 / 간석출판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