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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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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22:0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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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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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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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영 [가입일자 : 2004-02-07]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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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산문집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를 읽고 있는데,
앞 부분에는 당신의 어린 시절, 특히 건축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에 관한 글들을 실어 놓았습니다.
읽으면서 많은 걸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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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헬로'」
1945년, 즉 해방되던 해 가을 미군이 진주해 오자 사람들은 '헬로'(여보세요)란 말을 배웠다. 특히 어린이들은 '헬로, 헬로'하며 접근하며 껌도 얻고, 과자도 얻어 먹곤 했다. 당시 열네살 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어를 배워 보겠다는 단순한 욕심으로 불러 보았던 나의 첫 '헬로' 소리가 오늘날의 나, '건축가'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장소는 서울 덕수궁. 미군들이 많이 관광을 나오던 장소이다. 나의 첫 '헬로' 소리는 학도병으로서 헌병으로, 인천에 상륙한 어느 미군이었다. 영어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이십여세 난 청년을 당시 가회동 한옥 집으로 초대를 했다. 온돌에 앉혀놓고 김치도 먹이고, 영어사전을 한 손에 든 채로 한 미국 청년과 한 한국 소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에 이 학도병인 미군이 아직 재학 중임을 알았다. 그리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때 나는 건축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는 '건축가(아키텍트)'가 된다는 것이다. 건축가란 말 자체를 처음 들은 나는 건축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꼬치꼬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예술가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니다'고 했다. 건축가는 건축가라고 했다. 또 짧은 영어의 대화인지라 이 청년은 소년이 너무 물어대고 잘 이해를 못하니까 귀찮았던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잘라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 가장 중요한 사람이란 대통령 아니면 장관, 장군, 박사 등등으로 알고 있었는데 '건축가'란 직업은 초문이었다. 다시금 그에게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사람이란 말이오?"라고 되물어 보았다. 그는 딱 잘라서 큰 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소박한 소년의 마음으로 나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 하면서 더욱 캐고 물으니 그는 이어서 말해주기를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도 집이 없으면 살지도 못하고 대통령도 못하지. 그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은 건축가니까 더 중요하지 무어야"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 다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중요한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나는 순간 대통령보다도 더 중요한 직업, '건축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어떤 공부를 하면 대통령보다 중요하다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바싹 달려들어 묻고 싶었다. 그래서 이 미국 청년을 더 자주 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는 건축가가 되려면 우선 "소설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었다. 집을 짓는 직업에 웬 소설이냐고 반문했더니 상상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사진을 공부하라"고 했다. 물체를 보는 힘을, 흑백명암을 구성하는 힘과 관찰력과 추리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일주일을 졸라 아버지로부터 카메라를 입수한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나의 중학교에다 암실을 만들고 사진부를 만들었다. 다음에 그는 "그림을 그려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미술부에 들어갔고 또 그는 "음악을 하라"고 했다. 괴테가 말하기를 '건축은 냉동 음악'이라 했다면서 음악을 모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할 수 없이 합창단에 입단하여 한구석에서 창가를 배웠다.
또 그는 여행을 많이 하여 문물에 많이 접함으로써 안목을 넓히라는 말을 했다. 빨리 빨리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그는 "내일이면 늦다. 특히 건축가는 내일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므로 오늘이 중요하다"고도 역설했다.
나는 그로부터 내일이면 늦으리란 사상을 철저히 배웠다. 합리주의 나라인 미국 청년이 비합리주의 나라 한국 소년에게 일제의 전근대성을 탈피시키고 새로운 물결을 타게 한 것이다. 그 동기가 된 덕수궁 앞뜰에서의 '헬로' 한 마디 그리고 그와의 만남, 그것은 나에게 건축가로서의 인생을 걷게 한 결정적 '헬로'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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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선생의 집안이 상류층 부자이긴 했을 겁니다. 해방 이후 초창기에 유학 갔다오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한 분들이 다 그렇지요.
그런데, 단지 부잣집에 태어났다 해서 건축가 김수근이 될 수는 없었던 게,
이 글에서 보다시피 선생은 어떤 집념이랄 수 있는 근성을 타고난 듯 보입니다.
가치와 보람이 있는 일이다 싶으면 해야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해서 실행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공간건축사사무소 직원들을 데리고 여행을 갈 때에도 사무용 자동차를 팔아 갔다고 하고,
종합 예술 잡지 『공간』을 창간할 당시에도, 도대체 무모한 일이었지만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그 『공간』 지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만, 아무튼 당시에 그렇게 모험으로 창간해서 김수근과 공간건축사사무소가 한국의 문화계에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기여도 크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집념이 있는 상태에서, 인복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미군 청년도 그러한 것이, 지금 시대와는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20대 초반의 청년인데,
생각과 안목이 꽤 깊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20세가 되어 건축을 전공하러 일본에 유학해서 빈한하게 살았는데,
동네 어느 부잣집에 영어, 수학 가정교사를 하면서 그 집 사모님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모님은 김수근의 당시 빈한한 살림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보살펴주고 애정을 쏟았으며,
김수근이 건축을 공부하러 유학왔다는 걸 알고 동네를 다 뒤져 건축 전공 학생을 소개시켜줬는데,
그 소개받은 일본 현지 학생이 와세다대 건축과 3학년으로서(그 역시 이후 미국 유학을 거쳐 일본의 대가가 되었으며 김수근과 절친한 벗이 되었다고 함),
건축은 예술이므로, 자신이 다니는 와세다대보다는 동경예술학교가 좋겠다고 권해서 선생은 동경예술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안 재고 하겠다는 집념과 성실한 태도를 가졌기에,
이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인복도 딸려 왔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인복, 기회, 이런 것은 준비된 사람에게 오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또,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걸으면 그 정도로밖에 못 사는 것이고, 시선을 높이 두고 다녀야 그만큼 눈이 높아지고, 눈따라 실제의 나도 발전해 가는 것일테고,
그거 하면 뭐하냐는 태도보다는, 일단 하고 보자는 게 발전도 발전이지만 최소한 전자보다는 남는 장사겠구나라고도 느꼈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김수근이라는 거장도 없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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