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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비석 오른쪽 '졸' 아래 새긴 날짜는 1951년 2월 9·10·11일 중 하나다. 1951년 2월 9~11일은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신원면을 훑고 간 날짜와 일치한다.
신원면 일대에서 암약하던 빨치산을 없애겠다며 육군이 내놓은 작전 '견벽청야(堅壁淸野)'. 육군은 집과 식량을 태우고 주민을 몰살하며 작전을 실행한다. 박산골 517명, 탄량골 100명, 청연마을 84명 그리고 연행 도중 사살 당한 18명까지 '거창사건 희생자'는 719명이다. 나라를 믿던 국민에게 국민을 믿지 못한 나라가 저지른 만행은 비열하고 잔혹했다. 처참한 사살 현장은 거창·함양·산청 그리고 하동·마산까지 이어진다. 이 나라가 경남 곳곳에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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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떠안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희생자 명예회복을 염원하던 유족과 유족회 간부를 오히려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유족들이 1954년 가까스로 조성한 박산골 합동묘소를 서슴없이 파헤친다. 유족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로 그 서러운 날을 기억한다. 군사정권은 이후 연좌제 칼까지 씌우며 유족들 입을 막고 손발을 묶는다.
거창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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