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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할아버지에 대한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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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8 14:3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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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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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할아버지에 대한 단상 |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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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현 [가입일자 : 2003-01-10]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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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처갓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서울 성북동 초입 대형단지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아이 둘을 낳으며 10년을 살았습니다.
복도식 아파트라 출입구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경비 두 분이 격일 교대로
근무를 서셨는데 몇 해 전 몹시 춥던 설 연휴에 본가를 다녀오던 중
2평이 채 안 되는 비좁은 경비실에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한 채 쓸쓸하게
계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만들어준 떡국 한 그릇을 갖다 드렸더랬죠.
보잘 것 없는 떡국 한 그릇에 정이 오가는 훈훈함을 느꼈고 그 후로 교대 근무하는
다른 경비원이 계속 바뀌어도 그 분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외할머니 손에 많이 자라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남다른 아들과 딸이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각각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이 될 때까지 학교 등하교길에
경비 할아버지가 밖에 안 나와 계시면 경비실의 문을 열어서라도 늘 정겹게
인사를 하고 다녔는지라 밤늦게 퇴근해 눈인사만 잠깐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기가 바빴던 저에 비해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작년 겨울 1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이사 가던 날 차에 탄 아내의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길래 뭐냐고 물어보니 경비 할아버지가 아이들 먹으라고
새우깡과 웨하스, 초콜릿을 담아주셨다고 하더군요.
아파트가 언덕위에 있어 마트까지의 거리도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닌데다 얼마 되지도 않을 용돈으로 아이들 과자 하나하나 거친 손으로 담고
계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련해지더군요.
이사는 갔으나 동네에 있던 교회는 계속 다녔기에 일요일 마다 예전 살던 동네에
들를 때마다 아이들이 늘 경비할아버지 한번 보고 가자고 얘기했고
저 또한 아이들에게 과자 사주신 것에
대해 음료수라도 사들고 인사를 해야지 하면서도 다음을 기약하며 자꾸 미루다
이젠 교회도 옮길 예정이고 해서 자주 못 들를 것 같아 얼마 전 예전 살던 아파트에
들렀는데 마침 그 경비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인사하니 어찌나 반가워하시던지 우리가족이 이사한 후 아침저녁으로
늘 인사하던 우리 아이들이 많이 그리웠다고 하시더군요.
그간 핑계되며 찾아뵙기를 계속 미뤘던 일이 죄송스러웠습니다.
반가운 인사를 마친 후 차에 타려 하는데 경비할아버지가가 제 팔을 붙잡더니 아이들
과자 사주라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제 손에 쥐어주시는데 몇 번을 거절해도 막무가내로 제 주머니에 집어넣으시려고 하는 바람에 간곡히 거절하느라 꽤 힘들었습니다. 마음만 받겠다고...
돌아오는 길에 뭉클해지면서 가슴이 좀 아렸습니다.
몇 해 전부터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경비 비를 절감한다고 전자 출입구를 만들면서
아파트의 온갖 잡일을 감당하고 오며가며 정들었던 경비 할아버지들을 다 내쫒고
이제 복도식 아파트 몇 곳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얼마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인연에 대해 사람의 정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적지않은 세월이었는데 아직도 그분의 나이와 사시는 곳 그리고 연락처도
이름도 모릅니다.
지지하는 정당도 정치관도 종교관 그리고 삶의 이력은 더욱 모릅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형성하게 되는 인간관계에
경비할아버지의 존재는 기록되지 않을 미약한 기억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경비할아버지와 우리 아이들 사이에 주고받은 정과
헤어짐에 대한 아련한 감정은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퇴근 하면서 새로 이사온 집 전자 키 번호를 누르고 유리문을 들어가면서
조만간 수박한 통 들고 찾아봬야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때는 명찰의 이름도 외우고 연락처도 하나 받아 휴대폰에 저장해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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