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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 후속편? 한 아이의 상담보고서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06-09 01:42:49
추천수 1
조회수   537

제목

교육이야기 후속편? 한 아이의 상담보고서

글쓴이

김태호 [가입일자 : 2007-08-09]
내용
Related Link: http://board.wassada.com/iboard.asp

첫번째 이야기는 지난번 한 회원님의 고민에 답글로 달았었습니다.

오늘 우연이 과거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후 글도 올려봅니다.

그때 당시 넘 급하게 쓴 글이고 바빠서 매일 밤샐때 쓸수 밖에 없던 글이라

지금 다시 읽어보니 빈곳이 너무 많네요. ㅠㅠ...글도 엉성하고..ㅠㅠ..

그러다보니 이해도 안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을 듯합니다. ㅠㅠ

고치려다 귀차니즘으로 그냥 올려봅니다.

혹시나 궁금하신게 있으시면 보충해드릴께요...아마 없을듯합니다만..너무 글이 엉성해서..ㅠㅠ







교육제도의 문제는 뭐 제 개인적으로 사회전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시스템에서 나름 버틸 수 있는 방법들을 저희 나름 고민하고 있고 그 고민들을 엉성하게 풀어논글중 하나입니다.



혹시나 자녀분들과 소통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위 링크를 보시면 될듯합니다.





한 아이의 이야기.



(아이들과의 상담 보고서)





무기력한 아이, 화난 엄마





현대사회는 다양한 길이 있는 사회라고 합니다. 모두 다 동일한 라이프스타일을 갖지도 않고, 모두 다 동일한 인생경로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가능성과 다양성이 열린 사회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확실성이 보장된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확실한 길을 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길 찾기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확실한 길이 없다는 건, 그만큼 결과를 예측하기도 힘들어지고, 또 그만큼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지도 어려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누구나 ‘과연 이 길이 맞나’라는 의문과 ‘아니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걸어만 가야 한다면 사람들은 열심히 걸어가며 수많은 의문과 불안들 속에서 버틸 수밖에 없겠지요.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책임을 지게 되니 무척이나 억울해 합니다.



어떤 아이는 시험을 너무나 잘 보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성적이 좋으면 부모님이 기뻐하기 때문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시험을 잘 보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시험 볼 때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꼼꼼히 봅니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부족해 뒷부분을 다 틀려 버립니다. 혹은 너무 꼼꼼히 보다보니 너무 많은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배경 지식을 총동원하고 출제의도를 꼬아보고 문제를 풀다보니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들은 이런 아이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오늘도 아이가 책상에 엎드려 잔다면 침대에 누워 편히 자라고 방문을 열어 봅니다. 혹은 자주하는 실수가 안타까워 이런저런 조언도 하고, 학원도 찾아가기도 하시지요.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이런 걱정을 감시나 잔소리로 이해하고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냅니다. 학부모님들과 아이들 모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결과에 억울합니다.



아이들도 학부모님들도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서로 깊이 이해하거나 존중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서로 가장 좋아하고, 서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관계인 것이지요. 그건 ‘대입경쟁’이라는 배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이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존중해 주는 것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경쟁은 승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경쟁은 ‘어떻게 승리하느냐’ 혹은 ‘무엇을 위해 하느냐’ 보다는 1등이라는 결과만 중요합니다. 따라서 대입이라는 경쟁 속에서 서울대를 어떻게든 합격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과정과 서울대라는 목적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부모님이나 학생 모두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고민을 위해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고민 때문에 고등학교 내내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면, 아마도 학생과 학부모님 모두 불안할 것입니다. 경쟁은 고민하고 성장할 여유를 주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대입 경쟁은 아이를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것 자체만 중요해 집니다. 그러니 좀 더 안전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학부모님의 좋은 의도가 아이들을 이해할 여유를 주지 않는 셈이지요.



아이들의 경쟁은 아이들이 세상을 알기 이전부터 시작됩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입학 전부터 경쟁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혹은 아이에게 세상을 이해하기 이전부터 아이는 경쟁을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경쟁은 부모와 아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아이 입장에서는 1등을 요구하는 먼 길을 걸어온 것이죠.



만약 아이의 공부 목적이 부모로부터 인정이라면 경쟁은 절대 아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끔 합니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1등을 했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유지해야 하고, 그렇다면 부모로부터의 인정은 자신이 힘들게 공부하더라도 달성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지요. 그때는 이미 화가 잔뜩 나있거나 공부한다고 한들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상태가 됩니다.



물론 학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고 억울해 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 역시 자신도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부모님의 탓만은 아니라 옹호해 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부모님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게 세상이라 체념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건 단순히 누군가의 잘못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에 이겨야 안전하게 살 수 있고, 그래야 좀 더 행복을 꿈꿀 수 있다는 세상의 논리가 의도와 무관하게 학부모님들과 아이들 모두를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배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며, 또 필요이상으로 아이들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주어진 조건이 충분히 그렇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이들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아이들의 길 찾기가 시작 된다





현재 가르치고 있는 태음인 아이가 있습니다. 태음인은 상징으로 따지자면 땅과 같은 존재입니다. 땅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기보다는 나무가 꽃이 풀이 성장하기 위한 영양분과 물을 공급해 주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속에서 태음인은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을 때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관계 속에서 태음인은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가족 개개인을 살핍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발생하면 자기가 그 빈자리를 채워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태음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일을 알아야 아빠와의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음식에 대해서 알아야 엄마와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이성문제에 관심이 있어야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연예계를 알아야 동생과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태음인이 산만하다고 느끼는 것이나 오지랖이 넓다고 느끼는 것 혹은 생각이 많다고 느끼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1년전 이었습니다. 아이와 어머님이 함께 상담을 온 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까지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외고를 다니다 일반고로 전학을 온 녀석인데 수능모의고사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자 논술을 배워서 대학 진학을 할 요량으로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좁은 상담실에서 어머님과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얼굴에 짜증이 엄청 나있었습니다. 학원에 오기 전에 어머님이랑 한판 한 분위기를 풍기더군요. 그리고 제가 말할 때는 일부러 듣지 않으려 노력하고 제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질 땐 절반은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절반은 정반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 언어 시험 보다가 1번하고 2번이 헷갈리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5번을 찍지”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그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더군요.





“왜 그런지 아니? 짜증이 나서지? 문제는 풀어야 하는데 답은 보이지 않고, 이걸 넘어가고 다른 문제 푼 다음에 다시 와도 풀 수 있을지 확신이 없고, 만약 이 문제를 틀리게 되면 점수가 깍이게 되니 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듯 하고, 앞으로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럴 것 같으니 어떻게든 해결은 해야겠고. 그리고 결국 해결하지 못하면 이후 원하는 성적이 나올 수 없고 그러면 엄마가 실망하고 너를 믿어 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엄마에게 섭섭하고 짜증날듯하고 그러면 아빠도 싫어하고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고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 너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망쳐지고 너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망처진다면 넌 쓸모없을 뿐 아니라 집안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네가 싫어하는 친구들 뿐 아니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도 무시당할 듯 하고 무시당한다면 넌 친구들 사이에서 의미가 없어 질 듯 하고 이런 성적을 받으면 집안 친구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무시당할 듯하고 등등등. 이런 저런 생각이 폭죽처럼 터지니깐 답답하고 미치겠지? 그러니 짜증도 나고, 나중에 실수했다는 명분도 얻으려고 그냥 아예 상관없는 ‘5번이나 찍자’라고 생각해서 5번 찍지?”



그러니까 아이는 시험을 볼 때 생각이 많은 겁니다. 특히 언어는 수학과 다르게 ‘한국말’이고, 또한 내용이나 정서적 측면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들을 요구하는 ‘글’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더욱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겁니다. 자신의 경험도 고려하고, 자신이 들었던 배경지식이나 자기 개인의 생각을 넣기도 하고, 문제가 너무 쉬우면 출제자의 마음도 고려해보고, 너무 어려우면 시험의 목적도 고려하고. 그런데 만약 태음인 아이가 관계에 너무 지쳐서 혹은 화가 나서 세상을 꼬아보고 있는 중이라면, 혹은 태음인 아이가 너무 잘 보고 싶어서 더 신중해지고 있는 중이라면, 이러한 다양한 생각은 오히려 문제를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푸는 데 방해가 되지요. 그래서 때론 왜 틀렸는지, 왜 맞았는지 아예 납득하지 못하거나, 지문의 내용자체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게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특히나 수능언어의 성적은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이후에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는데 그녀석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이때까지 아무한데도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제가 처음 알아줬다고요. 그래서 그 녀석은 그 이후로 제 말은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때까지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면 아이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전 그 녀석의 결과보다는 노력했다는 것을 고마워하고 칭찬해 줍니다. 물론 미션을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를 해주진 않습니다. 혼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합니다. 사실 마음을 알아주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라서 혼내기도 해야 하고 칭찬도 해야 하고 계획도 같이 세우고 점검도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 이전에 마음을 먼저 알아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녀석은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합니다. 공부를 잘 해서 부모님께 그리고 주변에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잘 안 되는 공부라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열심히 앉아 있었지만 주위에서는 아무도 그런 노력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지 않을뿐더러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의심받고 비난 받았지요. 아이의 주변에서는 ‘아니 어떻게 잘하고 싶어 하는 녀석이 책상에 앉아 있지를 않는지 나는 이해가 안 돼?’ 혹은 ‘아니 어떻게 잘하고 싶어 하는 녀석이 숙제도 제대로 안 해?’라며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짜증을 계속 해서 내기도 하고 일부러 공부 안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어머님과 아이는 얼굴만 마주해도 싸우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의 항변을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어머님과 저희는 아이를 성장시켜야만 하는 부모이고 선생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선배이자 어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과 저희가 아이대신 공부를 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아이는 딱히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육사 나와서 군장교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라는 말씀을 지나가는 식으로 했는데 아이는 그것을 듣고 혼자서 육사 입시제도와 공부할 것들을 스스로 조사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이 태음인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기 싫은 공부도 억지로 참고하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부모님이 하나도 몰라주고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이는 무척 억울했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도 그 마음을 모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쟁에서 이겨야 아이의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알지만 아이를 재촉을 한 것뿐 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부모님의 마음과 아이의 마음이 서로 표현되지 않고 자신들만 알고 있으니 부모님도 억울하고 아이도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아이와 어머님을 만났을 때 한 것은 어머니와 아이의 마음을 전달해 준 것 뿐입니다. 그 첫 만남 이후로 아이는 최소한 저의 요구를 최대한 이행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학교도 가지 않으려하고, 대부분의 학원은 당연이 가지 않으려 하고, 과외 선생님도 한두 달 버티지 못했던 아이가 그 이후로는 학원을 아직까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경쟁은 ‘기대’라는 권력을 먹고 자란다.





아이들과 학부모님 상담을 시작한지 10년이 이제 넘어서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상담하면서 느낀 것은 아이를 믿지 못하는 학부모님을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한 모든 부모님은 아이들을 믿고 계십니다. 물론 일부 부모님들은 제 앞에서 아이를 믿지 못한다는 말씀을 차마 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기대와 믿음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믿음보다는 기대입니다. 기대는 아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부모님의 기대가 현실적이든 현실적이지 않든 아이가 보는 현실과 부모님이 보는 현실이 달라지는 순간 기대는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됩니다.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보다 상대방이 보고 있는 현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대는 상대방의 현실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처음에는 아이들도 그런 부모의 기대가 좋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기대란 것은 미래의 일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것으로 영원히 되지 않습니다. 조금 다가가면 또다시 미래는 그만큼 멀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기대를 쫒아 가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 특히 태음인 아이들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만약 멈추게 된다면 아이는 더 이상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때부터 아이는 버티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가자니 성공여부가 안보이고 포기하지니 버림받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멈춰서서 아무것도 안합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지만 이는 공부가 아니라 그냥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버티고만 있다고 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기에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정말 엄청난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면 힘들고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태음인 아이들의 경우 잠을 주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보통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잠이 오는 것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머릿속이 하얀 상태에서 책상에 앉아 있으면 잠이 오게 마련이지요.



사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사회가 그렇기 때문이지요. 부모님의 기대는 사회가 당연히 요구하는 기대들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대를 아이가 충족시키지 못하면 당연히 아이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부모님의 기대는 당연한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렇게 아이들이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대는 부모님의 의도와 무관하게 아이의 마음에 작동하는 사회의 권력입니다. 아이의 마음과 상관없이 정해진 길 혹은 가야만 할 길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 기대입니다. 아이가 부모님들께 삐져 있는 것도 사실은 권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아이 자신이 이런저런 노력을 했으니 부모님은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안되면 화를 낸 것이랑 다를 바 없지요. 기대란 것은 철저하게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것도 철저하게 아이의 마음입니다. 사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 이외의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기대를 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부모님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라 아이들은 느끼게 됩니다.





공부의 비법1 : 본디 능동적인 아이들, 그저 소통이 필요할 뿐이다.





기대보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대는 ‘어떠어떠한 미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믿음이란 ‘현실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기대한다는 것은 미래에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아이의 현재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넌 공부를 하면 될 녀석인데 안 해서 문제야?’. 사실 공부를 해서 안 되는 녀석은 지구상에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녀석들도 얼마 되지 않지요.



‘넌 틀림없이 SKY는 갈 수 있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처럼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미래의 일을 척척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엄청난 권력자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대통령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이 사회이고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약하디 약한 아이들이 과연 미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아이들 입장에서 기대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어떤 일을 만들어 낼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네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은 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지 않거나 성적이 엉망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부모님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하시지만 그와 더불어 기대를 져버린 아이에 대한 원망이 동시에 있습니다. 이런 원망이 조금씩 커져가기 시작하면 아이에 대한 믿음은 점점 없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가진다면 아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면 아이와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이는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축적된 아이와의 싸움이 한순간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아이는 부모님의 믿음을 시험하려 시비를 겁니다. 사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 즉 가족의 경우에는 작은 앙금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부의 비법2 : 조그만 아주 조그만 가능성을 직접 체험하게 해줘라





태음인들은 생각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주변의 상황에 관심도 매우 많습니다. 항상 주변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 나가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을 태음인들은 좋아 합니다. 하지만 짜증나고 답답할 때 드는 많은 생각은 아이를 지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생각은 대부분 자신을 공격하는 생각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생각이 많으면 당연히 피곤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폭죽처럼 터지다보니 자기가 하나의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경우 수백만 가지에 해당하는 경우의 수가 생각나게 되고 그 경우의 수 대부분은 안 좋은 결과가 일어 날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경우 어느 누가 쉽게 움직이겠습니까? 이런 경우 책상에 앉아서 집중하면 공부가 되긴 하지만 그 집중하기 까지가 무척이나 어렵지요. 혹은 집중을 하더라도 문득 문득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짜증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여지를 줄여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공부 환경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집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경우에는 독서실로 공부환경을 바꿔주는 것이지요. 물론 바뀐 환경은 아이에게 낯선 새로운 환경이 좋습니다. 기존의 환경에서는 자신이 익숙하기 때문에 갖가지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분위기 파악만 하고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이 찾아지면 그것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분위기의 낯선 독서실에서는 공부만 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여튼 생각할 여지를 줄여주게 되면 집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작은 변화지만 한 문제정도 더 풀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런 변화를 아이에게 설명해주면 자신이 걷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버티는 길에서 한 발짝 움직였다는 것을 아이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 발 더 움직일 수 있고 이후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음인들에게는 그 아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양만큼의 숙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나 학원에서는 고3 혹은 고2 학생들이 평균적으로 하는 숙제양을 내줍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는 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해야 할 것이 많아지고 그러면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앉아 있어도 숙제를 못하는 이유입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너무나 식상한 말이 태음인들에게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너무나 식상한 말이 참 어렵습니다. 내일 모레면 대입 수학능력시험일인데 그렇게 천천히 가서 어찌 갈 수 있을 것이란 불안감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두 걸음 세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다리에 근육도 생기고 지구력도 생겨서 빨리 오래 걸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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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원 2012-06-09 19:51:47
답글

두아이의 아빠로서 님 글을 참 생각을 많이 하며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호 2012-06-10 00:44:37
답글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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