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중심으로 재미있게 쓴 논리학 책 한 권을 보다가, 예시된 옛날 얘기가 재미있어서 옮겨 봅니다.
옛날에 어떤 양반이 있었는데, 말년에 심심파적이나 하려고
자기한테 거짓말 세 가지를 하면 상금 천 냥을 주겠노라고 방(벽보)을 써붙였다.
방이 붙고 전국에 소문이 퍼지자 상금을 차지하려고 팔도의 이야기꾼, 난봉꾼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어떤 놈은 금강산에 선녀가 내려와 자기와 여차여차했다고 왕거미 밑구녕에서 거미줄 늘이듯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그 양반은 "아, 그러냐? 오호~"라고 맞장구를 쳐서, 결과적으로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참말이 되어버렸다.
그 양반은 이런 식으로, 누가 어떤 거짓말을 하든 맞장구를 쳐서 속아넘어가 줌으로써, 그 말을 거짓말이 아닌 참말로 만들어버려
상금을 타먹으려고 몰려든 사람들 모두가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외진 산골의 더꺼머리 총각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못된 양반을 혼내주리라 마음먹고 그 양반에게 찾아왔다.
양반은 그 총각의 행색이 같잖아 보여 흰눈으로 시덥지 않게 바라봤지만, 소문 듣고 거짓말을 하러 왔다니,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어디 해봐라!"
양반이 자기를 대수롭잖게 여긴다는 걸 눈치챈 총각은 첫마디부터 허풍을 떨었다.
"대감께서 보시다시피 소인은 이처럼 호사스럽게 삽니다"
양반이 들으니 첫마디부터 같잖은 허풍이었다. 꾀죄죄하고 남루한 행색의 더꺼머리 녀석이 호사라니,
하지만 너같은 놈이 뭔 호사스럽고 귀티나는 행색이냐라 했다가는 거짓말이라고 인정하는 게 되니, 꾹 참고 받아넘겼다.
"응, 그러냐, 계속해봐라"
"예. 제가 이렇게 호사스럽게 부자로 사는 건, 남다른 방법으로 소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오, 그래? 어떻게 소를 키우느냐?"
"예, 저는 소를 궤짝 속에 넣어 키웁니다. 소에게 나무로 옷을 지어 입히고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놓은 다음,
여물을 쉴 새 없이 먹입니다. 그러면 소가 살이 푸둥푸둥 찝니다"
"응, 그렇겠지. 그래서?"
"나무 옷이 딱 맞아 꽉 끼면 살이 나갈 데가 없으니 옆구리의 구멍으로 계속 삐져나옵니다.
소인은 그 삐져나온 살을 칼로 잘라 먹기도 하고 시장에 팔기도 하며 이렇게 잘 살고 있습죠"
양반이 들으니 별 웃기지도 않은 황당한 소리인지라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이놈, 너같은 어린 상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놀리는 게냐? 그래, 네놈 꼬락서니가 어디 호사스럽게 사는 행색이더냐!!"
그러자 총각은 얼른 받았다.
"예, 그럼 제가 거짓말 하나 한 겁니다"
하고 시치미를 뚝 뗐다.
양반은 속으로 아차! 하고, 이제부터는 총각이 무슨 말을 하든 응, 그래, 그렇다라고 대답하리라 작정하고는,
"으음, 그래, 그럼 또 해보거라"
"예,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인이 어릴 적에 글을 잘 읽지 않았습니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듯한 촌닭같은 놈이 글을 잘 읽었다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양반은 다시 꾹 참고 대답했다.
"그래, 그랬다. 계속 얘기해봐라"
"예. 그것도 소인이 대감께 글을 배웠잖습니까? 그때 소인이 어찌나 글을 잘 읽었던지, 대감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너 참 총명하구나, 네가 크면 내 셋째 딸을 주마"고 하셨지요?
소인이 이제 글도 다 읽고 장성했으니, 따님을 주시지요!"
과연 양반에게는 과년한 셋째 딸이 있어서, 명문대가의 사윗감을 구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따위 어디서 굴러먹던지도 모를 비루한 상것이 자기 딸을 달라니, 분이 상투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이놈, 거짓말 말아라!'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인정하는 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네 말대로 그랬느니라'고 하면 딸을 줘야 될 판이라, 딸을 주느니 거짓말이라고 인정하는 게 낫겠다 싶어,
"야, 이놈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총각은 얼른 받아서,
"예, 그러면 소인이 두 번째 거짓말을 한 겁니다"
라며 즐거워했다.
두 번이나 거짓말이라고 인정했으니, 양반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한 번 뿐이니,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었네'라고 대답하겠노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총각이 거짓말을 계속했다.
"소인이 젊은 시절 봇짐 장사를 했는데요,"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놈이 젊었을 때 봇짐 장사라니, 또 되도 않은 황당한 소리였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응, 계속해보거라"
"예, 소인이 봇짐을 지고 어느 곳에 다다르니 위태한 바위틈 사이로 커다란 대추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습니다.
조롱조롱 달린 대추가 욕심은 났지만, 나무가 너무 크고 높아 따기가 어려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고춧가루 세 가마를 구해다 바위틈 사이에 쏟아부었습죠.
그랬더니 바위가 매워서 캑캑거리다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대추나무가 흔들리면서 주먹만한 대추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또 한심한 거짓말이었지만, 양반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래, 계속 이야기해봐라"
"대추를 주워모으니 수십 가마나 되었습니다. 그 대추를 몽땅 한양으로 갖고 올라왔는데,
마침 서울 장안에 대추가 귀해서 임금님 약에 쓸 대추조차 없었습죠.
그래서 대추 한 가마에 천 냥씩이나 했습니다"
계속 택도 없는 거짓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래서 부득불 또 맞장구쳤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네"
"예. 그래서 대감께서도 제 대추 세 가마를 외상으로 사다 쓰신 적이 있으신데, 여태 갚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외상값 좀 주시지요"
이번에도 끝까지 들으니 기막힌 소리였다. '그랬었다'고 하면 삼천 냥을 줘야 될 판이고,
'언제 그랬냐?'고 하면 거짓말 세 가지를 인정하게 되므로, 천 냥을 줘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이놈아, 내가 언제 네 대추를 외상으로 갖다먹었느냐!!"
라고 소리질렀다.
못된 양반을 세 판 다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총각은 태연히 받아 대답했다.
"예, 제가 거짓말 세 가지를 다 했으니, 이제 약속대로 천 냥을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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