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귀가 했습니다. 좀처럼 잡기 힘든 기회라 더 오랫동안 자리를 함께하고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귀에 담고 싶었지만, 동행인이 갑자기 호흡기에 무리가 생겨 오늘도 조금 무리해서 참석한 터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먼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참석기를 올리게 되었네요.
공지대로 조교수님께서는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고전역학의 성립과정과 완성을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연역법과 귀납법에 대해 먼저 기초를 다진 후, 그 방법론들이 실제 고전역학의 발전과정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가 주된 강연내용이었습니다. 많이 접한 내용이라서, 강연을 통해 다시 한번 내용들을 되세겨보고 정리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지만, 역시 대가의 평범함 속에는 늘 새로운 것이 있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왜 이런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를까 싶을 정도로 당연히 정리를 하고 넘어갔어야 하는 내용이고, 주어진 사료들로부터 충분히 연역(?)가능한 내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한 번도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방법론적 유사성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학적 방법론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무지가 드러나더군요. 이런 무지의 발견은 참 기분도 좋고 자극이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런 방법론에 관한 전반적인 강의가 끝나고, 잠깐 질문시간이 있었는데, 평소 흥미롭게 여겼던 문제에 관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데카르트나 칸트가 이렇게 서양 인식론과 과학적 방법론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신의 존재에 관해 긍정했습니다. 칸트야 그런 존재론을 과학에서 떨어뜨려 개인적 신념의 문제로 돌렸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데카르트의 신 존재증명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가 말한 엄밀한 연역법의 방법론에서 한참 벗어나는 부적절한 논증이었죠. 완전성에 대한 관념이 그 완전한 존재를 보증한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근거가 없으니까요. 윌 듀런트가 자신의 책에서 익살맞게, 칸트가 사실은 대중들을 위해서 자신은 믿지 않는 신의 존재를 긍정했다는 추리를 했듯이, 어떤 과학사가들은 데카르트의 신 존재증명도 그런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추리했습니다. 교수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제 우문에 대해 현답을 주시더군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그 상황의 맥락을 중요시해야 한다. 어떤 인식의 혁명을 이끈 주역들의 한계가 지금은 명확하게 보일지 모르더라도, 그때로서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새로운 생각을 선취하는 업적들이 쉽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그 때 실제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의 공인된 사상이 그 당시 얼마나 당대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고, 교수님이 강의의 주제를 확연히 드러내는 현답을 해주신 거죠.^^
쿤의 시각이 주는 참신함과 시야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나 의도적인 오해에 따라 선정적으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의 명백한 위력과 효과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악용되어왔습니다. 쿤이 이러한 사실을 들어으면 코웃음을 쳤겠죠. 그는 포퍼가 반증주의를 통해 과학을 강력하게 옹호한 것보다도 더 심하게, 과학은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페러다임만 확립할 수 있다면, 아주 엄격한 방법론 없이도 충분히 신뢰할만하다고 말했으니까요.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의 페러다임, 즉 인상적인 범례를 만들 수 없는 다른 여타의 지식추구의 방법론을 과학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쿤은 어떻게보면 인간 이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엄격한 방법론을 추구하는 학자들이 보면, 대책없는 낙관주의자로 보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 낙관주의자 처럼 보일 밖에요.ㅋㅋ). 이러한 성향 때문에 과학엘리트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고요(엄밀한 방법론 없이도 과학은 충분히 인상적인 범레를 만들고 효과적으로 기능하니, 그냥 믿어라!) 때문에 저는 쿤을 들먹이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자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아요. 자신이 뭘 이야기하는지도 모르는 덜떨어진 자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 빼고요.(혹은 형평성이 부족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이나)
그러나 조한욱 교수님은 - 당안한 일이겠지만 - 쿤의 이론을 우리 일반인들도 너무나 알기 쉽게 정확히 풀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케풀러의 선구였던 티코 브라헤의 예를 통해, 또 주전원 이론등을 통해 정상과학이 반례들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방법, 즉 보조이론들의 생성과정들을 말씀하셨는데, 시실 이것은 다소 과격한 쿤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면서 포퍼의 반증주의를 변호했다고 생각되는 라카토시의 "연구프로그램 이론"을 설명하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강의를 통해서 일반적인 오해를 강화하기는 커녕, 참석자분들은 과학적 방법론의 효력과 한계에 관해서 생각할 기회를 다시금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학자의 강의답게 풍부한 에피소드와 해석을 통해 정말 기억하게 쉽게 이야기를 풀어주시더군요.
중요한 건! 오늘 아이스크림 어디 갔나요?!!!!
학자적 양심을 걸고! 아이스크림!
ㅎㅎ 이걸 못 얻어먹었는데도 너무나 강의를 즐긴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만큼 유익하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동행인도 오늘 무리했지만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또 한 분 정말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조한욱 교수님의 절친이신, 황보석 선생님. 솔직히 동행인이 몸도 안좋고 황보석님의 테스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된 터라, 먼저 부탁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언제일지 모를 나중을 기약하며 한참 후에나 뵈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너무 죄송스러울 정도로 배려해주시고 더 적극적으로 말씀을 경청할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동행인도 큰 자극과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황보석님의 직업관과 태도에서 얻은게 많은가보더라고요. 보석 오빠! 사..사랑합니다!
또 언제나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강인권님을 만나뵐 수 있어서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항영님께도 크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참석하신 정혜윤피디님은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너무 재미있고 유머감각이 풍부하신 분이신 것 같더라고요. 아마 팬들이 많을 듯 싶습니다.^^
다른분들도 더 이야기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사정상 먼저 나와 결례가 죄송스럽고도 안타까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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