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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서사의 긴장관계 - 은교 감상평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2-05-07 00:21:43
추천수 1
조회수   1,302

제목

서정과 서사의 긴장관계 - 은교 감상평

글쓴이

용정훈 [가입일자 : 2002-04-27]
내용
Related Link: http://blog.naver.com/rockid74





일찌기 시인이었던 밀란 쿤데라는, 서정이 가지는 독단적 주관성과 그것이 드러내는 인간의 백치적 단순성,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선정성과 폭력성을 절감하고 일찌감치 소설가로 전향했다. 소설적 서사는 그런 독단과 폭력에서 벗어나, 상이한 입장들을 고루 경험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또 소설은 주관적인 결론보다는 그 주관성들이 부닥치는 객관의 현장에서, 인간의 영원한 삶의 주제들에관한 어떤 논쟁의 형태나 질문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이러한 소설관은 그의 소설과 에세이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 그러면 은교의 소설가 박범신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 [은교]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은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듯하다.







헌화가를 모티프로 차용한 이 작품(이 영화가 소설의 주제를 계승하여 각색한 작품이라고 전제한다면, 소설이나 영화라는 호칭은 어색하다)은 사실 연애와 젊음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소설과 시라는, 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두 장르의 긴장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장르소설 작가에서 본격문학 작가로 변신한 서지우의 모습은 박범신의 삶의 궤적과 그대로 일치한다. 박범신은 7~80년대에 주로 연애소설을 생산하던, 그야말로 잘나가던 베스트셀러작가였다. 그런 그가 어느순간 치열하고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자신이 품어왔던 나름의 주제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였다. 그 성취와 깊이, 혹은 완성도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정말로 치열한 글쓰기를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소설에 대한 애정이 없거나, 소설의 힘을 믿지 못하는 작가였다면 그의 그러한 변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박범신은 소설을 모멸하는데 온 힘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 은거하는 "국민시인" 이적요의 집에서 그의 수발을 들던 소설가는, 이적요의 피상적인 모습만을 볼 수 있는 협량한 안목의 소유자면서, 이적요와 소녀 은교의 관계를 의심하고 이적요를 박제화하려고 안간힘을 쏟는 인물이다. 한 술 더 떠서 그는 아예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증하는 작품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소설가를 곁에 두고 아낀다. 이적요의 태도는 혹시 소설가로서의 자기 한계를 절실히 느낀 박범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었을까?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기반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아마도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적요가 서지우를 바라보는 것 처럼 볼 것이다.







작품에서는 계속해서, 객관적 서사에 대한 서정의 우위, 소설에 대한 시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듯한, 키치적 대사가 들려온다. 시를 못 쓰니까 소설을 쓰고, 공대생은 별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소설가는 공장에서 찍어낸 수 천 개의 같은 거울이라도, 제각기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그런데 과연 그럴까?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을 떠올려보길. 그리고 플로베르의 산문정신을 떠올려보길.) 박범신은 마치 시인이 되지 못한 소설가의 열패감을 확인하려 이 작품을 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판단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확인케 하는 징후들이 보인다.







이적요는 그의 이름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들과 섞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가슴떨려하는 은교를 보고도, 그와 은교 사이에 있는 두꺼운 유리벽을 치우기를, 그는 주저한다. 반면 소설가는 어떤가? 자신이 주요 서점에서 판매부수 1위를 차지한 것에 신경쓰고, 스승의 진면목과 상관없는 세간의 평가에 신경쓰는 얄팍함을 가지고 그는 세상과 대면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는 세상과 직접 대면한다.







은교에게 스승에게서 떨어지라는 협박을 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은교를 불러낸 소설가는, 사실상 거기서 은교와 첫 관계를 가진다.(가슴팍을 찌르는 바늘과 피) 그에게는 그렇게 세상을 진짜로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순성이 있다. 그리고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솔직하다. 차안에서 은교에게 손을 대면서, 은교가 자기를 좋아하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그냥 외로워서라고 답한다. 솔직하지 못하거나, 아예 자신에 대한 반성이 없는 사람(슬프게도 대다수의 인간들이 이렇다)이라면 아마도 그 순간에,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했을 것이다.(너무너무 사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등등)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파멸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반면 시인은 어떤가? 그의 집은 세상에서 동떨어진, 고즈녁하고 품격있는 공간이다. 아마도 시인의 내면의 반영일 이 공간에서, 시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하던 욕망과, 그 욕망 앞의 자아상을 발견했을 때도, 직접적으로 대상을 경험하는 대신에 숨어서 훔쳐본다. 이 지점에서 박범신의 시와 쿤데라의 시가 갈린다. 박범신에게 있어 시란, 일종의 삶에 대한 내적 비평행위인듯 싶다. 아마도 박범신은 시에 대해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는 서정이 자신의 비밀을 갈무리하고 풀어헤치는, 일종의 만능열쇠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취 뒤의 서정을 간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 그 열쇠를 들이밀 세상의 자물쇠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서정이 쿤데라가 말하듯 한갖 경멸스러운 자위도 아닐 것이다. 세상이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적요속에서 빛나는 비밀이 있는 법이다. 은교는 말한다. "아무리 다 말한다 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은교는 할아버지 것이잖아요."



맞다. 비밀을 아무리 털어놓고 세상과 소통한다해도,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 이해를 바라지 않고 추구하는 와중에, 누군가 그 잔영을 흘끗 볼 수 있는, 그러나 그 그림자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러한 추구의 대상도 있는 법이다. 소설가는 이러한 추구의 대상도, 방법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박범신의)소설가가 소통할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공중앞에서 행하는 자위보다 더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범신에게는 그러한 추구의 대상이 욕망과 맞서는 자아상이었을 것이고, 방법이 아마도 시였을 것이다.(그런데 박범신은 시를 쓴 적이 있을까?)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라기 별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제 팔자를 다 남에게 내어주는 것이란다." 아마도 시인은 소설가가 내어주고 싶지 않은 내면,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깊은 서정의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







박범신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설이라는 투구와 방패를 가진 시인이고, 혹은 시라는, 소설가가 갈무리하고 싶은 내면, 동경하는 꿈이라는 시심을 간직한 소설가다. 그 비밀을 간직한 채로, (내면에 시인을 간직한)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이러한 구도는 여전히 순진해보이는 구석이 있지만, 진심이라면 쉽게 재단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시, 진심이라면, 이 순진하고도 위태한 균형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일부 아마추어 문단과 발전하지 않는 문학인들의 문제겠지만, 아직도 문단일부에는 시가 소설보다 우위에 있다느니, 창작을 하지 못하는 자가 평론을 한다느니, 문학은 천재성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설익었으면서도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낭만주의의 잔재가 완전히 걷히진 않고 있다. 다 큰 어른들이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는 이런 자위를 보는 일은, 그 수가 적더라도, 무척 민망하다.







http://blog.naver.com/rockid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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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희 2012-05-07 07:57:28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설도 한번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이기철 2012-05-07 09:06:36
답글

음 소설이든 영화든 봐야할것 같네요 읽고싶게 만들어버리셨네요.

박상규 2012-05-07 09:48:33
답글

아~ 용정훈님 소설가이신가요?? 아님 시인??? <br />
좋은 글 감사합니다.<br />
영화 '은교'를 봤을 때 보다 더 생생한 내용이군요.. 글 참 잘쓰십니다~

유귀한 2012-05-07 10:10:22
답글

성경책의 글자는 똑같은데<br />
종파마다 해석은 제각각이지요...<br />
<br />
같은 영화를 보면서 각자의 느낌이 다르듯<br />
<br />
두시간이 넘게 이 영화를 보면서<br />
이적요도 서지우도 은교도 <br />
안타까우면서 그들의 상황과 관계가 이해 됩니다<br />
<br />
공돌이라 거울이 다 똑같이 보이는걸까요?<br />
전 그저 서지우가 그 상황에(배역에서...역할상 스스로 성공할 수 없

장준영 2012-05-07 10:29:16
답글

설득력있는 좋은 비평 잘 읽었습니다.<br />
<br />
세계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산문 정신, 서사성, 과학성이 전근대와 구분되는 근대성이라고 볼 때,<br />
아무리 근대 이후 문학이 서정으로 대표되는 시가 양식에서 서사, 산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해도,<br />
문학 역시 예술인 이상, 온전히 산문적, 서사적이 될 수는 없고, 시가적 서정성에 대한 동경을 늘 품고 있는 건 문학 예술의 숙명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김재용 2012-05-07 11:06:30
답글

<br />
스토리 만으로 보아서, 말할 수 없는 내용이 담긴 것 같으며<br />
<br />
隱 敎 가........ 밀교로서 받아들여집니다.<br />
<br />
적요와 은교가, 소설 속에서는... 육체적 관계는 없다고 합니다.

박태희 2012-05-07 11:37:51
답글

사무실에서 꼼꼼히 다시 읽어봤습니다. 모든게 다시 보여지네요. <br />
갑자기 쿤테라 소설도 읽고 싶구요....

용정훈 2012-05-07 13:36:39
답글

좋게 봐주시고 좀 생뚱맞아보일 수도 있는 글을 이해해주셔서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br />
<br />
박태희님 쿤데라 소설 강추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관심 1g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br />
<br />
이기철님, 전 소설을 읽지 못했어요. 사실 어떤 영화를 보기전에 우너작을 읽지않고 보는경우가 드문데, 그간의 박범신의 소설을 보면서 이사람은 제가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구나,

진성기 2012-05-07 14:25:30
답글

흘러 나오느 내용을 훔쳐듣고는 별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br />
이 글보고 나니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br />
<br />
영화에 숨겨진 코드를 잘 잡아 내는 재주가 있으신 듯.<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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