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방법론에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관찰과 실험 그리고 어떻게 서로 다른 과학적 현상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합리적 인과 관계등을 기초로 하여 자연현상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모델을 제시하고나 설명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원리나 그 원리에서 파생되는 관련된 현상을 예상하는데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반하여 법칙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르거나, 시간이 다르거나 공간이 다른 것에 관계없이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이 수행될 경우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매우 엄격한 것이고 이것을 벗이나면 흔히 과학자들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의 경우와 같은 것이죠. 연구 부정을 통하여 실험의 재현성이 없는 것을 단지 자신의 손재주 때문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론과 법칙은 다른 것입니다. 법칙은 달라질 수 없는 반면에 이론은 새로운 법칙이 나와 이론이 수정할 필요성이 생기면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물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변화시키고 이것이 형태적인 변화 또는 생리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근간이 되는 법칙인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은 이미 수없이 많은 현상이 관찰되고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이 되는 현상으로 정립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선택이 축적이 되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고 하는 진화론의 이론에서 이것을 뒷받침하는 현상이나 실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뒷받침하는 현상은 존재하는데 이것을 실험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수백만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실제로 실험실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의 주기가 짧은 미생물이나 초파리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환경을 주고 여기서 자연 선발되는 개체를 찾아내고 이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추적을 합니다.
가령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면역 시스템은 면역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물질을 인식하고 배척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생명체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선택적으로 구별하여 이용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면역하면 항원-항체 반응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현상입니다.
이런 면역 현상중에서 동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면역이 있는데 이것을 선천성 면역이라고 합니다. 이 선천성 면역은 수억년의 시간이 지나왔씀에도 불구하고 동물과 식물에서는 공통의 인자가 관여하고 있고, 방어하는 기작도 거의 유사한 형태로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생명현상에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생물이던지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시 면역은 그대로 보존하고 순환계를 가진 생물이 진화하면서 자연에 적응하여 만들어낸 면역이 항원-항체 반응이지요. 이것은 처음에 원시 세포가 만들어지고 세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방어 기작인 면역과 진화하면서 만들어 낸 면역이 고등 생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공통 조상인 세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을 하는 이야기이고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도 손상이 일어나거나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의 진화와 새로운 종의 발생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진화론이 법칙으로 정립하는데는 실증할 수 있는 자료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단지 합리적 설명을 하는데 필요한 실험적 자료이지요.
실제로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영원히 법칙으로 정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종교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동일한 법칙에 근거하는 이론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성경에 적힌 문구를 근거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폄하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와 실증을 통하여 만들어온 인류의 과학, 문화 예술이라는 부분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어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중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 국한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와 같은 논쟁을 1950-60년대에 격은 서구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이미 양립 불가능한 논쟁으로 치부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사실은 인지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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