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면 될 것 같네요.
고수분들은 개념 정리 정도니까 안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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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 가운데 살아남은 강한 인간 -다윈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진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담은 획기적인 저서『종의 기원』을 출간하였다.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가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은 이래 진화론은 줄기차게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다윈의 이론이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단순히 관념적인 이론에 불과하였다면 그와 같이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은 그가 수집한 수많은 자료들을 이용한 과학적인 이론이었고, 그 때문에 기존의 진화론과는 다른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화론은 수많은 논쟁과 검토를 거치면서 그 타당성을 점차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다윈이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인간을 보는 관점에 일정한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다윈 이후의 사회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이론이 서구 세계를 지배하던 관념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을 간파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생각들과 진화론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오해와 남용을 초래했다. 결국 사람들은 진화론을 통해서는 과거에 누리던 인간의 영화를 복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최근 들어서는 동물과 공통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와 같은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오늘날의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탐구가 전적으로 생물학적 특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들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측면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다윈 진화론의 요체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의 진화론은 그보다 앞서 진화의 기작을 해명하려 했던 라마르크(jean B. Lamarck)와 대비된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크게 용불용(用不用)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용불용설이란 신체 기관 중 사용 빈도가 높으면서 유용한 기관은 진화하고, 그렇지 못한 기관은 자연스레 퇴화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예를 들어 기린은 나뭇잎을 먹기 위해 목을 자꾸 늘임으로써 목이 길어지게 된 것이고, 우리의 신체에서 사용되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다면 그 기관은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라마르크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말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획득한 특징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눈을 혹사하여 눈이 나빠졌다면 자식은 나쁜 눈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일반 동물들뿐만 아니라 인간마저도 다른 종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다윈은 라마르크와는 다른 진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생각했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생명체는 생존할 수 있는 개체 이상의 자손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2) 태어난 개체들 사이에 변이가 존재한다.
(3) 자원상의 제약으로 인해 이들 모두가 생존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경쟁이 이루어진다.
(4) 이와 같은 변이들 중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적응한 개체들은 살아남게 되는 반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5)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가 점진적으로 누적되고, 마침내 출발점과는 다른 종이 탄생한다.
다윈은 동 식물의 품종 개량과 맬서스(Thomas Malthus)의『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통해 이러한 자연선택이 일어나는 기제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먼저 품종 개량가들은 동·식물에서 원하는 성질만을 선택해서 번식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다윈은 인위적인 방법이 개입되지 않고서도 이러한 개량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고찰해보았고, 여기에서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다음으로 다윈은 모든 종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이 중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영감을 얻어 자연선택의 원리를 도출해냈다. 맬서스에 따르면 인구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식량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는데, 만약 인구증가가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제한된 자원을 확보하기위해 사람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경쟁력이 강하고 적응력이 있는 강자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다윈은 이와 같은 맬서스의 착상을 자연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가경쟁'과적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이 의식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계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복잡한 동기를 매개로 일어나는 의식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의 차이로 인해 모든 생명체 중 일부가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따름이며,적응또한 어떤 의도가 개입된 능동적인 행위가 아닌, 단순히 어떤 형질을 갖춘 생물이 어떤 특정한 환경에서 우연히 다른 생물들에 비해 자손을 많이 번식시킴으로써 더 유리한 생존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과 이를 통해 바라본 인간
다윈의 진화론을 둘러싸고 발생한 커다란 논쟁 중의 하나는 인간도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산물인가 하는 점이었다. 다윈의 기본적인관점은 생물계가 자연선택 이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관점을 인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그는 『종의 기원』을 발간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 또한 진화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질적으로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다윈은 이를 정식으로 공표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에 따라 인간에 관한 내용을『종의 기원』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오랫동안 밝히지 않았는데, 이후 자신의 진화론이 서서히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자, 용기를 내어 인간의 진화를 본격적으로 다룬『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를 출간하였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 또한 진화 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동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에게까지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면 이는 기존의 인간에 대한 관념에 매우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파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인간은 다른 종과 질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고유한 종이 아니다
(2) 인간은 진화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존재가 아니다.
(3)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종의 불변성에 대한 제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종(種)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믿음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며, 종교의 힘에 의해 더욱 강화된 관념이었다. 서양에서 이러한 관념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두 철학자들에게 종은 일종의 형상(Form)이었고, 따라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관념은 중세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지배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기독교의 창세기에 따르면 며칠 만에 모든 생명이 창조되었고, 그렇게 창조된 종은 영구불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지배하에 있던 서구 사회는 이와 같은 교리를 믿고 따랐으며, 이러한 상황은 교회의 권위가 어느 정도 허물어지게 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18세기에 이르자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관념의 기저를 흔드는 증거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 각처에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종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분류학자들은 이러한 종들을 기존의 분류 방식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종들은 종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적절하게 분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화석에 대한 탐구도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 화석은 과거의 종과 현재의 종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천지창조가 6천 년 전에 이루어졌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의문을 가져왔으며, 이와 동시에 특정한 종이 지금까지 줄곧 진화해왔음을 입증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이 밖에도 동물에게 흔적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정한 종이 모종의 변화를 겪어왔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지질학상의 증거 및 동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기본구조 등은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리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다윈은 변화의 점진적인 누적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탄생하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각 종이 독립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종과 종 사이는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양자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어떤 종이 영원토록 가지고 있는 특유의 본질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윈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라만상에 각각의 특유한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본질이, 사자에게는 사자만의 본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각각의 종이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고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한다면 각각의 종 간의 차이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특징들은 다른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되었던 기억력, 주의력, 호기심, 모방, 이성등과 같은 정서와 능력마저도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실제로 다윈 이후의 유전학은 과거에는 비교 대상일 수 없었던 유인원이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오늘날의 진화론자들은 인간과 침팬지 간의 전체적인 차이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과일파리 종들 간의 유전적 거리에 상당할 따름이며, 코카서스인,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일본인 간의 유전적 거리의 25~60배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와 더불어 진화시간으로 따져볼 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인 2천만 년 전에 이르러서야 침팬지와 인간의 계통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목적 없는 진화
진화라는 개념은 다윈이 최초로 착안해낸 것이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주장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로 보았을 때 이와 같은 진화론은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나 진화가 곧 발전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처럼 진화에 발전의 개념이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은 그 유래가 2천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우주 전체가 서서히 발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사다리에서 무생물들이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사다리의 가장 상위에 인간이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어받은 19세기의 진화론자 라마르크는 단순한 형태의 생물이 더욱 복잡한 생물로 점차적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펜서(Herbert Spencer)또한 진화를 발전의 원리로 파악하여 진화가 더욱 복잡하고 완벽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신학자인 샤르뎅(Teihard de Chardin)은 진화과정을 정점(頂點)으로서의 인간을 산출할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피라미드 또는 사다리 구조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상당수의 진화론자들은 대체로 진화가 발전적으로 이루어지며, 진화 과정 자체가 선(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사실상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진화가 곧 발전을 의미하며, 인간이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한다는 생각은 현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이며, 인간의 감정이 이입된 세계 해석인 것이다. 만약 진화가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내지 사다리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진화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로 다른 생물들 위에 군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적어도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는 가장 존엄하면서도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진화 과정 자체가 올바른 것이라면 인간의 다른 동물들에 대한 지배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윈이 생각하기에 진화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거나 발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종은 맹목적인 자연력의 작용에 의해 우연히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마치 바람이 부는 방향에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처럼, 다윈은 진화 자체에 어떤 목적도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우연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특정 종은 단지 주변 환경이 그 생명체에게 유리하게 작용함으로서 우연히 살아남은 것일 따름이며, 그와 같은 종이 다른 종들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에 존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환경이 달랐다면 그 종은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거나 아예 다른 종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만약 진화의 참모습이 이러하다면 인간은 적어도 진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는 측면에서 다른 종을 임의로 이용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이거나 강자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인간 종을 탄생시키기 위한 어떤 섭리가 작용해서 탄생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유전적 변이와 환경 조건에 의해 우연히 탄생했을 따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성 능력을 포함해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양한 특징, 나아가 인간이 정신 능력을 사용해 일궈놓은 눈부신 업적들 또한 우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무신론적 세계관
다윈의 진화론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무신론을 함의함으로써 인간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았을 때 오랫동안 서구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믿음은 오직 인간만이 신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진 신의 특별한 피조물로, 동물과는 엄연하게 구분된다는 신학적인 믿음이었다. 특히 인간의 이성 능력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위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인간은 이성 능력을 갖추고 있음으로써 신의 모습을 닮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는 서구 사람들이 인간 생명의 신성함 또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강조했던 믿음이었다.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됨으로써, 그리고 이성 능력을 지님으로써 지구상에서 특수한 지위가 확보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7세기의 과학 혁명 이래 이와 같은 믿음은 줄기차게 도전을 받게 되고, 급기야 다윈의 진화론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신학적인 믿음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게 된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은 인간의 영혼 또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듯했는데, 이에 따라 인간이 다른 인간 아닌 동물들에 비해 유달리 존엄하지도, 존중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함으로써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라는 관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신의 특별한 창조물일 수 없게 되었으며, 단지 진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하나의생물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반면 과거에는 인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던 인간 아닌 동물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격상된 듯했다. 종전의 신학적인 관념에서 동물들은 인간이 편의에 따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이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처럼 다윈의 진화론은 신의 중재자로서의 인간의 위상을 재고하게 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진화의 우연적 산물임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격하시켰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사회진화론과 진화론의 오용
인류 역사상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처럼 인간에 대한 관점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과학 이론은 없을 것이다. 그의 진화론은 너무나도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관점이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그런데 다윈이『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발간할 당시에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보완할 부분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진화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멘델(Gregor Mndel)이 유전 법칙을 발견하고, 20세기 초 윗슨(James Watson)과 크릭(Fransis Crick)이 DNA구조를 해명하고 난 이후였다. 다윈이 살아 있을 당시만 하더라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은 엄밀한 과학적 증명을 통과하지 못한 단계였고, 진화를 이루는 메커니즘에 대한 의견의 일치도 없었으며, 진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과학의 이름을 빙자하여 임의로 진화를 해석·적용하였으며, 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진화론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다윈의 진화론이 미치게 된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진화론은 어느 새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과학 이론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신의 천지창조를 부정하고,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과 신의 창조,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이론은 시대적 요구였다고 볼 수 있다. 사회진화론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자연의 영역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제 영역에 진화론을 적용시키고, 그로부터 일정한 결론을 도출해낸 일군의 사상들을 일컫는 말이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 진화론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19세기 중반에 비롯되었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대체로 보았을 때, 사회진화론자들은 진화 과정의 모든 결과가 좋은 것이며, 그 과정의 각각의 단계는 모두가 완전성으로 향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진보가 필연적으로 도덕적 진보이며, 이에 따라 우리가 살아갈 규범이나 지침마저도 진화에서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진화가 불가피한 것이고, 인간이 진화 과정에 개입할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따름이며, 인간의 간섭으로 인해 초래될 결과를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을 조절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입장에 설 경우, 사회진화론자들이 진화의 기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생활지침이나 규범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진화론자들은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여기에서 살아남는 것을 진화의 주요한 특성으로 간주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회 다윈주의자들의 입장은 자칫 인종 차별, 빈부의 차 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는데, 실제로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번영과 약자의 파멸을 정당화시키는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회진화론은 당대의 정치· 경제 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미국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독일에서는 헤겔(Ernst Haeckel)에 의해 국가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진화론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계급 간의 불평등, 제국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정책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한 폐해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진화론들이 이와 같은 악용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서구 대부분의 국가들이 표방했던 정책이 자유방임주의와 제국주의 등이었고,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 매우 유용했기에, 사회진화론은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앞서 살펴봤던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진화론의 문제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사회진화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진화는 완전성으로 향하는 움직임과 상관이 없다. 이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우연한 적응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진화는 도덕적 진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진화는 사실의 영역이며 여기에는 어떤 가치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비판은 적어도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서는 과거로부터 고수해왔던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은 지능을 포함해 일부 능력이 유달리 발달함으로써 지구상에서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역할은 아니며, 진화론이 그러한 지위를 보장해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이며, 우연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따름이다
사회생물학의 대두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우연적 존재라면, 진화론이 밝혀줄 수 있는 것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고상한 위치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생물학적 특징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일 것이다. 최근 들어 바로 이러한 특징에 대한 연구가 사회 생물학(Sociobiology)또는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성행동, 공격성, 이타성 등이 나타나는 원인을 진화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며, 이와 같은 특징이 생래적으로 주어졌음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자 한다. 그들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과거에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여러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단지 유전학뿐만이 아니라 동물행동학·생태학· 심리학 등의 성과가 활용되고 있으며,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폭넓고 견고한 지식을 통해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일부 특성을 진화론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학문인가? 1970년대에 들어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윌슨(Edward Wilson)이『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Sociobiology : A New Synthesis)을 발간하였는데, 그는 책에서 사회생물학을모든 형태의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인 기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한다. 윌슨에 따르면 사회생물학은 다양한 생물 종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사회적·심리적 그리고 행동적 특성들을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활용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 양식을 탐구하면서 어떻게 그들의 사회적 행동 양식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연구하며, 그중 인간사회생물학에서는 인간의 희노애락 등의 정서와 관련된 행동들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그들은 동물들과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혈연 이타성이나 호혜적 이타성의 진화론적 배경을 탐구하며, 다양한 성 행동들 속에서 일련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찾아내고자 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와 같은 특징들이순수하게 문화적으로 결정된 성향 가설'보다는유전적인 토대를 갖는 성향 가설'을 통해 더욱 단순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연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유전자 선택 이론(kin selection theory)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라는 책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진화에서 선택의 단위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의 존속과 번성을 부지불식간에 도모하는 신체적·심리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을 바탕으로 사회생물학자들은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을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전자 선택 이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자식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또 다른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가 없으며, 나아가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한편 자식 외의 혈연들도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그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런 이타성이 나타나게 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처럼 자식을 포함한 친족들에 대한 이타성을 혈연 이타성(kin selection)이라고 부르며, 이를 생래적으로 주어진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사회생물학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회진화론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회진화론은 사회가 발전적으로 진화해가는 것으로 파악하며, 자연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마저도 진화의 과정 속에서 설명하려는, 일종의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발전론적 세계관이다. 이에 반해 사회생물학은 행동이나 심리상태를 포함한 각종 사회적 현상의 배후에 놓인 공통적인 생물학적 특성을 현대 과학을 동원해 밝혀내려는 학문이다. 그런데 과거 사회진화론의 폐해 때문인지 사회생물학이라 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회생물학을 통해 각종 차별의 정당화,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 관점 등을 떠올린다. 이외에도 사회생물학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본 사람들은 어떻게 유전자가 이기적일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의 특성들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사회생물학에 등을 돌린다. 하지만 일반인들, 나아가 일부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 중에는 사회생물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 적지 않다. 물론 본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의 문제에서 사회생물학자들이 비중을 두어 설명하는 쪽은 본성 쪽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본성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을 뿐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사회생물학자들은 최근 들어 양육과 본성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 사회생물학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적절하다면 사회생물학을 생물학적 환원주의 또는 생물학적 결정주의로 몰아세우면서 인간을 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이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회생물학이 말하는결정'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경우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회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본성 내지 결정됨의 의미
우리는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본성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떠한 본성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본성은 얼마만큼 우리를 구속하는가? 그와 같은 본성은 변형될 수 없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사실상 인간 사회생물학의 핵심적인 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 아닌 동물들은 어떤 특정한 것만을 학습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분되며, 무한한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윌슨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도 어떤 특정한 내용을 학습할 뿐 다른 것을 학습하지 못한다. 설령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져 있어도 우리의 선택 폭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선택 폭의 제한은 우리의 본성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본성을 강조하는 사회생물학은 흔히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윌슨을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의 입장에서 결정론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결정론은 생각보다 과격한 의미의 것이 아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입장을 굳이 결정론으로 분류하자면, 그들의 결정론은 약한 의미의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생물학자들은 우리에게 이성 능력이 있으며, 이를 활용하여 생물학적 본성에 대항할 힘이 있음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근친상간을 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언어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더라도 만약 언어를 배우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언어를 습득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결코 그와 같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근친상간 회피 성향 및 언어 습득 능력 등이 맹아로써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일 뿐, 거기에 대항할 능력마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2) 사회생물학은 문화적 또는 환경적 요소의 개입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리하여 설령 왼손잡이의 성향을 타고 났어도 일정한 훈련이나 사회적인 제재를 통해 왼손이 아닌 오른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은 왼손을 더욱 잘 사용할 수 있는 성향 자체를 타고 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사회생물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결정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사회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의 유전자가‘하나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식의 본성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는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성애와 관련된 단일한 유전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행동은 수많은 유전자들의 영향을 받는,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조건화의 영향을 받는 매우 복잡한 특성이다. 이처럼 사회생물학자들이 말하는결정’은 생물, 특히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일일이 제한받는 존재임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4) 사회생물학이 본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선택의 여지없이 오로지 한 가지 행동만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와 같은 결정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회생물학자들이 말하는‘결정’이란 전형적인 고착화된 반응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결정됨은 일정한 선택폭을 갖는 결정됨이며, 그것도 가능성만이 규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윌슨은 공격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구체적인 형태의 조직화된 폭력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 고문할 때 피고문자를 고문대 위에 올릴 것인가 아니면 막대기나 말뚝에 붙들어 맬 것인가, 목을 자를 것인가 잡아먹을 것인가, 또는 전사들끼리 결투를 벌일 것인가 아니면 대량 학살을 자행할 것인가 등을 일일이 구별하는 유전자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생래성’을 이야기할 때 사회생물학자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어떠한 특징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생래성'이란 어떠한 특징이 어떤 특정한 환경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측정 가능한 확률(measurable probability)을 의미하는 데에 불과하다
(5) 사회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생래성은 상당히 넓은 의미이다. 또 다시 공격 행동의 예를 들자면 모든 동물 종을 총괄하는 공격행동에 A에서 Z까지의 유형이 있다면, 이 중 어떤 종의 동물이 나타낼 수 있는 공격 행동의 가능 범위는 모두 다르다. 개가 A에서 C까지를 나타낸다면, 토끼는 B에서 D까지를 나타낼 수 있고, 동일한 종 내에서도 편차가 나타날 수 있다. 이 중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범위는 다른 종에 비해 훨씬 넓은데, 그렇다고 인간이 A에서 Z까지의 모든 공격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결정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사회생물학자들은 우리에게 일정한 본성이 있으며, 그것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정한 학습을 강요받는다고 해도 닭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해부학적․생리학적 측면에서 유인원들과 매우 흡사해도, 인간이 완전히 침팬지나 오랑우탄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높은 지능을 소유하였으면서 인간과는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 다. 만약 그들이 꿀벌과 같은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왕을 중심으로 뭉칠 것이며, 수천수만이 단체 생활을 하고, 적의 침입에 대해서는 인간에 비해 훨씬 자발적으로 대항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인간들에 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진화의 산물
지금까지 우리는 진화론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과거로부터 기독교는 인간 영혼의 영원불멸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세상 내에서의 인간의 위상만이 유독 중요시되었다. 이에 따른 결과로 기독교 문화 전역에 걸쳐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은 인간의 영혼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이에 따라 인간이 다른 인간 아닌 동물들에 비해 유달리 존엄하지도, 존중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듯이 보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서구 세계를 지배해왔던 신 중심의 세계관에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것으로 보임에 따라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회진화론자들은 진화를 임의로 해석하여 세상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창조에 대한 신의 개입 등을 고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은 과학이 아닌 형이상학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은 오용됨으로써 적지 않은 폐해를 안겨주었다.
우리가 진화론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인간은 기존에 누려왔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적어도 과거에 인간의 지위를 뒷받침 해주던 신학적 근거를 통해 인간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진화론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인간도 결국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라는 입장일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생물학자 내지 진화심리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인간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들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 고등한 사회생활이나 높은 지능의 피할 수 없는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들은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의 산물인 동시에 인류가 문명 생활을 하기 이전에 발달한 것들"이다.
이처럼 사회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진화론적 기원을 갖는 일정한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적한다. 하지만 설령 이러한 특징들이 그들의 관심사라고 해도 그들이 인간을 유전자에 의해 철저하게 조정되는 존재 또는 생물학적 특성에 지배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사회생물학이 옹호하는 인간관을 이야기하자면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적 측면, 환경 그리고 의지의 영향을 인정하되, 그중에서 생래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인간관을 옹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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