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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음반리뷰추천 > 상세보기 | 2004-01-28 11:07:22
추천수 1
조회수   4,185

제목

[감상]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글쓴이

김영민 [가입일자 : 2002-05-22]
내용

한 곡의 음악을 접하고 그래서 또 한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을 접합니다.... 음악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 다가감이 다르고 처음 작곡가와, 또 연주가들과, 또 듣는 사람까지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그러므로 해서 그 감동도 달라 집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한 재 발견일 수도 있고 내 자신이 변해 버려서.. 그렇게 다시 다가 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또한 일생을 살아오면서 각기 가졌던 사소한 특별함일 수도 있고 개성이 가지는 눈부신 그 사람만의 단편적 위대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가령 길거리에 차이는 무수한 돌이라도 그것을 주워 들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다시 들여다 보고 그 속에서 인생과 감동과 나아가서 삶의 이치를 어떤 더한 의미들을 찾을 수도 혹자들에게는 가능할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음악을 듣는 이유랄까.. 아마 그러한 명제를 자문해 보면... 나는 왜 음악을 듣지? 이거 없으면 어떨까? ^^ 신영섭님께서 자주 표현하시던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이 음악을.... 어찌 보면 기분따라 다른 음악을 틀고 크게는 기호에 따라 장르를 정하고... 때로는 벽을 쌓기도 하고 또 허물어도 내며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갈증도 풀어 보고 눈물 겹던 감동으로 남아 있던 지난 감동도 되새겨 봅니다...

아마 그런 기억은 단순히 음악 한곡만이 아닌 자아와 함께한 인생으로 기억되어져 나의 한 부분으로 남기 때문은 아닐까요? 10년 일기를 읽으며 그때의 나를 그려 보듯이 말입니다..


언제나 지나간 시절은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작곡가의 들어 왔던 곡이지만 최근 다시 들으며 다른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있어 옮겨 봅니다.....

저는 장영주가 연주한 서주와 론도를 좋아합니다만 지금 들으시는 이작펄먼의 연주도 좋구요.. 설득력 강한 연주를 들려주는 프랑스 바이올리스트 오귀스탱 뒤메이의 연주 또한 압권입니다... 볼륨을 12시정도까지 올리시고 들어 보시면 좋으실 겁니다....~~~






샤를르 카뮈 생상

1835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에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12월 16일 알제리의 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파리로 옮겨졌으며,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생상은 음악가이었던 그의 큰고모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이미 천재적인 면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11세 때인 1846년에 생상은 첫 번째 공개연주회에서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의 협주곡을 협연하였으며, 1848년에 파리 음악원을 찾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그리고 나중에 오르간 전공으로 정식입학을 하였다. 부분적으로 독학을 하기도 하였지만 어릴 때부터의 그의 지칠 줄 모르던 학구열로 인하여 생상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그가 전공한 피아노와 오르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생상은 기악음악의 형식과 더불어 성악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851년에 오르간으로 파리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한 생상은 파리의 성 마들렌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하였다(생상은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1877년까지 일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3년간 그는 니더마이어(Niedermeyer)의 후임으로 음악학교의 피아노교수로 있으며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와 같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1852년 이후 생상은 두 번에 걸친 로마콩쿠르 도전의 실패와 안 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내림마장조 (op. 2, 1853), 바장조, 라장조(1856/1859), 가단조(op. 55, 1859), 미사곡(Messe solennelle, 1856), 오라토리오(Oratorio de Noel, 1860)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op. 17, 1858) 등을 작곡하였다. 1864년 이후 생상은 "삼손과 데릴라"(Samson et Dalila, 1868) 등과 같은 10여 개의 오페라와 극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가지고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많은 음악회를 가졌다. 생상의 음악을 접한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이나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30-1894),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 프란쯔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그리고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등은 그의 음악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쿠프랭(Francois Couperin, 1668-1733)이나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 이후 19세기의 중엽까지 프랑스에서는 이웃나라인 독일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나 멘델스죤(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혹은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등과 같은 뛰어난 음악가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프랑스의 음악은 거의 외국의 음악가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생상은 낭만주의시대의 프랑스음악을 부흥하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한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871년에 생상은 프랑스의 음악계에 '국민음악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 진흥에 노력하였으며, 젊은 작곡가들을 육성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까지 음악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신하려는 교향악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생상 자신도 이 시기부터 20여년 동안 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교향시 "옹팔르의 물레"(Le Rouet d'Omphale, 1872), "파에통"(Phaeton, op. 39, 1873) "죽음에 무도"(Dance macabre, op. 40, 1875), "헤르쿨레스의 청년시대"(La Jeunesse d'Hercule, 1877) 등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교향곡 다단조(op. 78, 1886)를 작곡하였다. 제3번 교향곡으로 알려진 이 다단조 교향곡은 생상의 작품 가운데 최대의 관현악곡으로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넣은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스트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은 그의 제4번 피아노 협주곡이나 바이올린 소나타처럼 두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악장을 다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일반적인 교향곡의 형식처럼 네 개의 악장을 가진 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생상은 피아노 협주곡으로는 사단조(op. 22, 1868), 내림마장조(op. 29, 1869), 다단조(op. 44, 1875)와 바장조(op. 103, 1896) 등의 작품과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1886) 그리고 환상곡 아프리카 (Africa, op. 89, 1891)를 남기고 있다. 이밖에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1880), 첼로 협주곡 제1번(1873), 피아노 삼중주곡 그리고 피아노 사중주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동물의 사육제"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그리고 "하바네라"(Havanaise) 등은 아직도 음악회장에서 지속적으로 연주되며 사랑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하여 생상의 이름은 전 유럽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가지고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여행을 하였다.

생상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음악가이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기교를 가진 피아니스트겸 오르가니스트이었다. 생상은 당시에 음악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독일의 고전파와 낭만파의 음악에 이해가 깊었으며,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자신의 뛰어난 음악성이 잘 다듬어진 구성미를 갖추고 배어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음악성과 낭만주의적인 자유스러운 기법은 그의 오페라나 교향시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생상은 자신의 음악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하도 아니고 베토벤도 아니며 바그너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이 생상은 자신의 음악에서 어떤 특정한 주의나 작곡가의 경향을 추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적 사상을 표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기법적인 면에 있어서 고전적인 경향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음악적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낭만적이었다. 이러한 면을 통하여 그의 음악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생상은 낭만주의 음악가들 가운데 특히 프란쯔 리스트의 음악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리스트의 음악 가운데 특히 교향시에 대하여서 생상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상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사고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많이 절충하고 있다. 이렇듯 생상은 모든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을 떠나서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작곡가이었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작품 28

작곡가이며서 위대한 연주가였던 생상스로서, 같은 시대의 비르투오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이 피아노의 대가였던 리스트, 그리고 바이올린의 귀재 사라사테는 그로서는 하나의 모범이며 목표였다. 생상스와 바이올린과의 관계는 브리지타워로서 시작된다. 이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브리지타워는 베토벤이 <크로이쩨르 소나타>를 헌정한 것으로 유명한데, 만년에는 자주 프랑스를 방문했었다. 젊은 작곡가는 그에게서 먼저 이 악기에 대한 흥미를 환기하게 되었는데, 훨씬 젊은 세데인 사라사테의 연주에 더욱 경이를 느낌과 동시에 같은 세대에 살고 있는 음악가로서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 천재를 위하여 제 1번과 제 3번의 두 협주곡과 이 작품 28을 헌정했던 것이다, 화려한 기교와 젊디 젊은 정열리넘치는 이 곡은 사라사테의 손에 의하여 널리 유럽 일대에 연주되었고 그 이래 바이올린 독주의 고전적 레퍼토리로서 정착했다. 후에 드뷔시가 이것을 2대의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것을 보아도 이 곡이 얼마나 애호된 것인지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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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원 2004-01-28 11:48:30
답글

요즘은 생각이 다른 분이 너무 자기것을 고집하면.. 그냥 씨익~~ 웃으며 "그러네요"하고 넘어갑니다. ^^ 그래서 마음의 벽이 더 두터워지는지도 모르지만...(근데 스크롤 양이 장난이 아니네요.) ^^ 잘 듣고 잘 보고 갑니다. 저도 퇴근하고 물려봐야겠네요. ^^

김영민 2004-01-28 13:58:47
답글

^^ 그래도 승원님께선 마음이 따뜻하십니다... <br />

박노건 2004-01-29 07:51:50
답글

정말 좋은 음반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알고있던 곡이고, 꼭 구입하고픈 것이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제가 감명깊었던 불란서 영화에서 점찍은 것인데, 곡목을 잊어버려 구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감사...

pureguy@interprime.co.kr 2004-02-14 09:47:59
답글

루치에로 리치의 오래된 녹음도 권해 봅니다..저도 80년대 중반에 이노래를 접하고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된 노래인데 그당시 엘피로 참 맛깔나게 들었었습니다.현란한 기교보다는 거장의 찐한 연주를 느낄수있습니다..언제들어도 감동 받는곡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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