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ted Link: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769.html
학교폭력에 대하여 강력한 대처를 바라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굳이 부르디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학교는 결코 우리가 사는 사회와 동떨어진 곳아 아니고 오히려 그 첨예한 대립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분들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폭력에 대한 강력한 대처는 현실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위폐하고 추상화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아이의 경우 문제부모, 사회경제적 곤궁, 심리적 이유등등이 그 원인이고, 그 이유는 구체화 될 수 있으나, 그저 그 탓을 그 부모 개인의 문제, 더 좁게는 그 문제 아이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는 그 개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제의 위폐이지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일뿐.
또한 개인의 인성이니 교육이나 뭐니하는 말장난은 더 우스운 이야기이지요. 술을 먹이고는 취하지 마라라고 하는 것일뿐.자기는 안취했었다고 거짓말하는 것일 뿐.
저야 먹고사니즘에 빠진 인간이라 공부나 활동이 안되고, 탐욕으로 가득찬 인간이지만 다음의 글을 쓴 이는 열심히 활동하고 공부하는 좋아하는 형입니다. 학교폭력과 직접 관계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부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해 볼 만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이하는 칼럼내용입니다. 원래 칼럼제목은 이게 아닌데 한겨레에서 선정적?으로 바꿨다고 투덜대시더군요 ㅎㅎ
강남아이들이 노스페이스를 잘 안입는 이유
문화의 가장 큰 기능은 ‘구분 짓고’, ‘무리 짓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구분 짓는 것과 무리 짓는 것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같다. 우리는 무리 짓기 위해서 구분 짓고, 구분 짓기 위해서 무리를 짓는다. 무리를 짓는 순간 다른 무리와 나를 구분하며, 구분되는 순간 나와 동일한 집단과 같이 무리를 짓게 된다. ‘노페’(청소년들 사이의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 열풍)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분하고 무리 짓기’이다. 이를 통해 그 안에서 서열을 둘러싼 ‘치열한’ 위세 경쟁이 펼쳐진다.
나이키·프로스펙스 때와 뭐가 달라
그러나 이 자체는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경험한 것처럼, 특정한 상표나 물건을 통해 학생들 사이에 위세 경쟁이 일어나고 서열이 만들어지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다. 교복자율화와 함께 시작된 전두환 시절에는 나이키와 프로스펙스, 그리고 아디다스와 아식스가 그런 물건이었다. 좀더 지나서는 ‘오리털 파카’로 위세 경쟁이 펼쳐졌다. 처음 한국에 소개된 오리털 파카는 당시 돈으로 15만원인가 20만원인가 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요새 대장급 취급을 받는 노페보다 오히려 더 비쌌다. 그후 교복이 다시 등장하면서는 어떤 브랜드의 교복인가를 놓고 또 위세 경쟁이 펼쳐졌다. 한때는 청바지도 있었다. 수입 청바지가 대유행하면서 너도나도 가져야 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한 벌에 20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가격을 따져보면 부모 등골을 빼먹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학생들이 경제적인 것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눈다고 개탄하거나, 과거와 비교해서 지나치게 가격이 비싸다는 것은 전혀 초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때와 비교해서 왜 이렇게 청소년과 위세 경쟁을 문제시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문제(Problem)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문제적(Problematic)으로 바라보며 누가 그것을 문제로 만드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와 비교해서 그리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을 문제화했을 때는 반드시 그 문제화를 통해 만들어내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아니라 문제화가 그 사회의 징후를 드러낸다.
여기서 우선 지적하고 싶은 징후가 바로 ‘위기’이다. 어떤 위기인가. 졸업식 뒤풀이부터 노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지금 강박에 걸린 것처럼 청소년들을 불온시하고 범죄시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청소년 관련 뉴스가 헤드라인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런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당장 강력한 어떤 대책을 세워야만 하는 긴박함이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게 된다. 그러나 청소년을 문제화하는 현재의 호들갑은 전혀 다른 무능과 위기를 은폐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민주화 이후’ 청소년들을 어떻게 다루고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가 총체적 무능상태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위세 경쟁이 과거에도 있었으니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위세 경쟁이 일어나는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고전적 의미에서 위세 경쟁은 권력층이 대중 앞에서 펼치는 의례였다. 부족사회의 위세 경쟁에서 유명한 것이 북미에서 행하던 포트래치 같은 것이 있다. 북미 인디언들은 자신의 위신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 재산을 파괴하고 나누는 잔치를 벌이곤 한다. 나는 이런 잔치를 벌일 수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물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얻었다’는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례할 의무를 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수치를 느낀다. 그가 답례하지 않으면 영원히 체면을 잃게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완전히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위가 추구하는 것은 이윤이 아니라 명성이다. 이런 포트래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장과 귀족들의 행사였다.
청소년에 대한 총체적 무능의 징후
여기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우린 촌스럽게 그런 것 안 하는데요.” 항간에 유행하는 노페 현상에 대해 특목고 나온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그런 것 가지고 자랑 떠는 아이들은 더욱 없다고 한다. 강남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남 아이들은 다른 동네에 비해 잘 안 입는다고 한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길거리에서 눈대중으로 살펴보더라도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니는 아이수는 현저히 줄어든다. 강북이나 지방에서 더 난리다. 강북에서도 홍대 근처와 구로구, 중랑구 같은 곳이 또 달라진다고 한다. 강북이나 지방은 노페라는 무리 짓기를 통해 자신을 불가촉천민과 구분해 드러내야 하는 반면, 이들은 노페를 통해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구분되지 않은 것으로 구분 체계 자체를 뛰어넘는 특권적 방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페를 통해 드러나는 위세 경쟁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다. 나이키 시절의 위세 경쟁은 부족사회에서 보이던 위세 경쟁과 비슷하다. 권력자들이 더 많은 위세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과도하게 파괴하거나 증여하는 것을 통해 경쟁을 펼치던 것이 나이키 시대의 위세 경쟁이었다. 이때에는 강남이건 중산층이건 자신이 가진 아이템을 대중에게 과시했다. 그것은 다른 대중이 가질 수 없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위세 경쟁은 대중 앞에서 펼치는 그들의 과시였다. 과거의 위세 경쟁은 부자들이 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위세 경쟁에서 부자들은 사라졌다. 중산층 이상이 노페의 위세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사라진 큰 이유는, 위험 사회의 도래와 성채 사회(Gated Society)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우선 이들은 강남이나 특목고처럼 ‘자기들만의 공간’에 어느 정도 폐쇄적으로 모여 살기 때문에 위세 경쟁 자체도 자기네 내부에서 펼치지 굳이 대중 앞에서, 대중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대중의 위세 경쟁과 한 걸음 떨어져야 더욱 자신을 구별 지을 수 있다. 나아가 지금은 불특정 다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노출해 과시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갈수록 중산층은 ‘사생활 보호’와 안전을 도모하는 데 초점이 맞춰 있다.
대신 위세 경쟁에 뛰어든 것은 이들을 제외한 ‘거의 전부’다. 위세 경쟁의 범위가 일부에서 전체로 확산되었다. 노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현재의 위세 경쟁은 중산층 이하의 대중에게서 일어나고, 그 양상도 하층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해진다. 마치 부족사회가 식민화되면서 식민 모국의 물품들이 급격히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족사회의 위세 경쟁이 대중화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뉴기니의 ‘쿨라’가 있다. 쿨라는 일종의 증여의 고리 같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쿨라에 투여한 물건이 멀리 퍼져나갈수록 내 명성은 높아진다. 이렇게 내 명성을 높여주는, 내 정성스러운 노동이 새겨진 물건을 이들은 ‘키툼’이라고 부른다. 키툼은 새로운 쿨라의 경로를 열 수 있고, 쿨라에 참여할 수도 있다.
위세 경쟁, 상층에서 중산층 이하로
그런데 모리스 고들리에가 쓴 <증여의 수수께끼>에 따르면, 현재 뉴기니의 마심 지역에서 쿨라를 주도하는 것은 뉴기니인들이 아니라 ‘빌리’(Billy)라고 불리는 유럽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임노동자를 고용해 대량으로 조개껍데기를 키툼으로 가공한 뒤 관광객에게 팔기도 하고, 쿨라에 투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유럽인이 목적하는 것은 당연히 명성이 아닌 이윤이다. 한국에서 청소년들이 위세 경쟁을 펼치는 동안 알토란같이 이윤을 챙기는 것이 ‘노스페이스’라는 초국적 기업인 것처럼 말이다.
위세 경쟁이 대중화될수록 위세 경쟁의 대상이 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의무’에 가까워진다. 과거에는 나이키를 가지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페는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아이템이다. 이걸 가지지 못하거나 가질 수 없는 학생들은 ‘불가촉천민’이 된다. 반드시 가져야 하는 아이템이라는 것이 누구나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는 반드시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서만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흔히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제도가 ‘달릿-불가촉천민’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불가촉천민은 카스트 제도의 맨 밑바닥이 아니라 카스트 제도의 ‘바깥’이다. 카스트에 의해 식별될 필요가 없는 존재다. 역설적으로 식별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식별되어야 한다. 그래서 힌두 사원에 들어갈 때 남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게 되어 있다. 상위 카스트의 남자들은 웃통을 벗으면 하얀 줄을 두르고 있는데, 불가촉천민은 그걸 두를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 역시 웃통을 벗는 순간 불가촉천민으로 구분된다. 어깨에 줄을 두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카스트 제도의 바깥, 즉 ‘예외’들이 카스트 제도를 떠받든다.
불가촉천민 구분하려는 표식
노페가 학생들 내부를 계급으로 나눌 때 나타나는 양상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노페 중에서 어떤 시리즈를 입는가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문화의 큰 특징은 식별할 필요가 있는 것과 식별할 필요가 없는 것을 먼저 구분한다. 즉, 노페는 무슨 시리즈를 입었는가에 따라 세심하게 ‘대장’부터 ‘찌질이’까지 구분하는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구분할 가치도 없는 아이들을 식별해낸다. 이들은 구분 자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구분되지만 무리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왕따’다. 그들은 철저히 구분되어 있지만 그 어떤 무리에도 속해 있지 않다. 다만 다른 무리를 ‘무리’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표식에 불과하다. 이들은 결코 노페를 입어선 안 되는 존재다. 이들이 ‘건방지게’ 노페를 입는다면 그것은 카스트 제도를 붕괴시키는 위협적 사건이 된다. 따라서 못생기고, 되지도 않는 주제에 노페를 입는다면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직접적 폭력이다.
왕따를 중심에 놓으면, 왜 노페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위세 경쟁을 주도하는 게 ‘일진’이라 불리는 ‘노는 애들’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거에 이들은 아이템 경쟁에서 약간 비켜나 있었다. 이들이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그 힘을 과시하는 방식은 주로 ‘파괴’였다. 중산층이 고가의 아이템을 구비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했다면, 교복을 줄이거나 치마를 말아 올리는 것같이 기존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는 데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학교라는 권위와 질서의 파괴자로서 말이다. 물론 한편에서 이들은 여전히 이런 ‘튜닝’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노페라는 아이템을 통해 학생들 내부에 서열을 분배하고 통제하는 주도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지금 펼쳐지는 위세 경쟁의 소실점은 바로 ‘왕따’이다. 이 소실점에 의해 전체 위세 경쟁이 받쳐지고 유지된다. 이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왕따가 되고, 왕따는 이 경쟁에 끼어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필사적으로 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왕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래전 인도의 인권운동가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가촉천민,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인도를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비슷한 말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왕따,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한국의 청소년과 학교를 알 수 없다.
글 / 엄기호<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저서로 <닥쳐라, 세계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