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 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남영동>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 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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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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