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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고구려 영토는 북경부근까지 였다!!!!!!! (일본, 북한의 반응)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12-28 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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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493

제목

충격!!!고구려 영토는 북경부근까지 였다!!!!!!! (일본, 북한의 반응)

글쓴이

최정현 [가입일자 : 2008-06-19]
내용
Related Link: http://blog.daum.net/nero1003


최근 북경에서 발굴된 고구리 유물 관련기사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568§ion=sc3§ion2

고구려 영토는 북경부근까지 >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임
이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것인데

각국별로 반응을 살펴보면

(1) 일본

-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이 북경까지 였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 한국 고구려사는 수정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 무덤 벽화 인물이 일본 것과 유사하여 고구려와의 연관성 연구 필요

(2) 북한

- 고구려의 북경유역 진출을 확인해주는 명문의 유물이다

(3) 남한 : 서울대 고고학 김원룡

- 일본, 북한의 주장은 비록 명문이 있어도 믿을 수 없다
- 북경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와야 믿을 수 있다
- 혹시 귀화한 중국인 무덤일 수도 있다

(4) 지금 학계의 현황

- 유주자사 진 무덤 언급 자체를 금기시 한다
- 그 제자들은 "귀화한 중국인"일 가능성에 집중한다
- 근거는 "김원룡 교수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학계






그리고 지나 사서의 기록




연연(蠕蠕)과 고구려(高句驪)의 영토



※ 고구려(高句驪)와 서토【西土=서역 西域】의 국가들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누구하나 시원한 해설이 없다. 고구려(高句驪)가 반도(半島) 왕조라는 기존의 역사 해설은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의 전유물이기 때문에 이미 퇴색된 지 오래다. 대륙의 왕조였다는 주장이나 설은 많으나 그것을 역사서속에서 찾아내어 설을 사실로 만들기에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본인이 원전(原典)을 뒤지는 이유이며, 실제 원전(原典)속에는 고구려(高句驪)가 대륙의 북방왕조(北方王朝)였다는 증거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을 인용하여 대륙조설(大陸朝鮮)을 주장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수많은 기록 속에서 몇 글자라도 찾아내어 증명하려 하는 작업은 실로 어렵기만 하다. 아래 글 역시 이미 여러 차례에 소개한 것이나 보완하여 “고구려(高句驪)”가 대륙의 “북방왕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기록을 여러분과 함께 논의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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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典(통전) 邊防 傳(변방 전) / 蠕 (蠕) 연연 〔 (中略). 又 六 代 孫 社 崙 , 兇 狡 , 甚 有 權 略 。 度 漠 北 , 侵 高 車 , 深 入 其 地 , 遂 并 諸 部 , 凶 勢 益 振 。 北 徙 弱 落 水 , 始 立 軍 法 : 千 人 為 一 軍 , 軍 置 將 一 人 ; 百 人 為 幢 , 幢 置 帥 一 人 。 其 西 北 有 匈 奴 餘 種 , 國 尤 富 強 , 盡 為 社 崙 所 并 ,號 為 強 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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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손 “두륜(杜 崙)”은 흉악하고, 교활하여, 권세와 모략(權略)이 심하였다. 막북(漠北)을 건너 고차(高車)를 침입하여 그 땅 깊이 들어가, 마침내 여러 부(部)를 병합하여, 흉한 기세가 더하여 떨쳐 일어났다. 북쪽의 “약 낙 수(弱 落 水)”로 옮겼다. 처음으로 군법을 세웠는데, 일천 인을 1 군으로 하고, 군(軍)에는 장수 1명으로 하고 ; 백인(百人)을 당(幢)으로 하고, 당(幢)에는 우두머리 1인을 세웠다. 그 나라의 서북(西北)에는 흉노 여러 종족들이 있었으며, 나라는 더욱 부강(富强)해져, “두륜(杜 崙)”이 모두 병합해 버리고, 강성(强盛)이라고 이름 하였다.



연연의 “두륜(杜 崙)”이 서역(西域)의 “고차(高車)”를 침탈했다고 하니,【通典 邊防 傳 / 北狄 4 : 高 車, 蓋 古 赤 狄 之 種 也. 初 號 為 狄 歷, 北 方 以 為 敕 勒, 諸 夏 以 為 高 車, 丁 零 焉. ➡고차(高車)는 북적(北狄)으로, 모두 옛 적적(赤狄)의 종류이다. 처음 이름 하기를 “적역(狄 歷)”이라 하였다. 북방(北方)에는 칙 륵【勅勒은 철륵(鐵勒)이다. 후대의 회흘(回紇)이다. 】 과 여러 하(夏)의 고차(高車). 정령(丁零)이다. 】



고차(高車)는 정령(丁零)과 철륵(鐵勒)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며, 이들이 있던 곳은 천산북로(天山北路)의 북쪽과 서북쪽지방이다.



이러한 곳을 연연(蠕蠕)의 “두륜(杜 崙 )”이 침입하여 『빼앗았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북쪽의 “약 낙 수(弱 落 水)” 주위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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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幢)에 대하여 ;



위의 기록 중 연연(蠕蠕)왕 “두륜(杜 崙)”이 군법(軍法)을 세울 때 군대의 단위로 『백인(百人)의 병사들 집합체를 “당(幢)”이라 하고 “우두머리”를 두었다. 』고 한 “당(幢)”이란 군대 단위는, 신라(新羅) 때 둔 군대(軍隊) 단위 가운데 하나로, 귀당, 구서당, 대당 따위가 있었다.



<위키 백과>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 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연(蠕蠕)의 정규 군대(軍隊) 단위인 “당(幢)”과 신라의 정규 군대(軍隊) 단위인 “당(幢)”과의 유사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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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 西 則 焉 耆 之 北, 東 則 朝 鮮 故 地 之 西, 北 則 渡 沙 漠, 窮 瀚 海, 南 則 臨 大 磧. 其 常 所 會 庭, 則 燉 煌, 張 掖 之 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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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라의 『서(西)측은 언 기(焉耆)의 북쪽이며, 동(東)측은 조선(朝鮮)의 옛 땅 서쪽이며, 북(北)측은 사막(沙漠)을 건너 한해(澣海)에 다하며, 남(南)측은 대적(大磧)에 임한다. 그들이 상시로 만나던 장소는 돈 황(燉煌)과 장액(張液)의 북쪽이다.』



蠕蠕(연연)이 있던 곳을 살펴보면 ; (전에 필자가 여러 차례 우려먹은 메뉴입니다. 보충했습니다.)



❶ <서(西)측으로 신강 성 焉 耆(焉耆)의 북쪽>은 ;『천산북로(天山北路)의 북쪽지방 준갈이사막(沙漠=砂漠)이며 』



❷ <동(東)측으로 朝 鮮의 옛 땅 서쪽>은 ? ;



❸ <북(北)측으로 사막(沙漠)을 건너 한해(瀚 海)가 다하는 곳까지> ;



❹ <남(南)측으로 대적(大 磧)에 임한다.> ; 대적(大磧)지대는 사타 부(沙陀 部)에 있다. “포 류 해”와 “알타이산맥”사이의 땅을 “대적(大磧)”이라 한다. 또한 이곳을 “적중(磧中)”이라고도 한다.



➎ <그들이 상시 만나는 장소는 돈 황(燉煌) 및 장액(張液)의 북(北)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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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하는 “연연(蠕蠕)”의 영토(領土)를 자세하게 알아보자.



❶ 의 <서(西)측으로는 신강(新疆) 언 기(焉耆)의 북쪽>은 ; 천산북로(天山北路)의 북쪽지방이며, 준갈이사막(沙漠=砂漠)지대이다.



❷ 의 <동쪽에는 “옛 조선(朝鮮)”의 서쪽 땅>은 ? ; 이들이 상시 만나 회합을 갖고 만나던 곳이 돈 황(燉煌)과 장액(張液)의 북쪽지방이라고 했으니, 『장액(張液)의 남쪽인 “청해(靑海)호” 와 북쪽으로 “액 제 납 호수” 및 “고비사막” 과 그 북쪽의 “항 애 산맥”을 연결하는 남북(南北)선에서 그 동쪽지방은 “옛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라 할 수 있다. 【필자의 주장은 더 서쪽지방으로 넓혀져야 하나 위 통전 기록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 당시 연연(蠕蠕)이 있을 때 그 동쪽의 “옛 조선의 땅”에는 “고구려(高句驪)”가 있었으므로 연연(蠕蠕)과 고구려(高句驪)가 모의(謀議)하여 인접국을 쳐 그 땅을 나누어 갖자는 밀담(密談)을 할 수 있으며, 또 두 나라 왕실 간에 혼인(婚姻)으로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아래 북사 ❷-1 참조】



곧 통전 북적 7 편의 <鹽 漠 念>편을 보면 ; <皆 北 狄 種 類 , 相 與 婚 姻 , 高 氏 聘 蠕 (蠕) 女 為 妻 , 宇 文 氏 以 突 厥 女 為 后 : 모두 북적의 종류이며, 고씨(高句驪)는 연연왕의 여식(女息)을 처(왕비)로 하고, 우문 씨는 돌궐왕의 여식(女息)을 왕비(后)로 서로 함께 혼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❸ 의 <북(北)측으로는 사막(沙漠)을 건너 한해(瀚 海)가 다하는 곳까지> ; 이곳의 사막(沙漠=砂漠)은 “준갈이사막”이며, 이 사막(沙漠)을 건너면 현 러시아 땅이며, 이곳의 북쪽에 “한해(澣海)” 곧 “북해(北海)”가 있다.



❹ 의 <“大磧(대적)”지방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 이곳은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대적(大磧)지대는 사타 부(沙陀 部)에 있다. “포 류 해”와 “알타이산맥”사이의 땅을 “대적(大磧)”이라 한다. 또한 이곳을 “적중(磧中)”이라고도 한다. (아래 자치통감 ❹-1 참조)



<그들이 상시 만나는 장소는 돈 황(燉煌) 및 장액(張液)의 북(北)쪽이다.> ; 돈 황(燉煌)과 장액(張液)의 북쪽지대는, <알타이산맥>의 최 남쪽지방이며, 약수【弱水=거연 성 곧 흑수성이 있다】의 서북(西北)쪽으로 ‘신강(新疆)과 외몽골’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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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 1 <북사(北史) 열전 글란(契丹)국 인용>



〔太 和 三 年, 高 句 麗 竊 與 蠕蠕 謀, 欲 取 地 豆 干 以 分 之. 契 丹 舊 怨 其 侵 軼, 其 莫 賀 弗 勿 干 率 其 部 落, 車 三 千 乘, 眾 萬 餘 口, 驅 徙 雜 畜 求 內 附, 止 於 白 狼 水 東 .〕



〔태화 3년, 고구려(高句驪)가 몰래 (竊 : 도둑질 할 절, 몰래) 연연(蠕蠕)과 모의하여 “지 두 간(地 豆 干)”국의 땅을 빼앗고 나누자고 하였다. 글란(契丹)은 옛 원한으로 그를 번갈아 (軼 : 번갈아 질) 침략하니, “막 하 불 물 간”은 부락 무리들을 인솔하여, 수레 삼천 승에 무리 만 여구(口) 및 여러 가축들을 몰고 옮기면서 내부에 붙기를 청하였는데, 백랑 수(白狼 水) 동쪽에 머물렀다. 〕



▶ 위의 기록과 같은 내용은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에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치거나, 또는 해설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지두간국(地 豆 干 國)”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었기에 서역(西域)의 북방지대에 있었던 “연연(蠕蠕)”이 “고구려(高句驪)”와 은밀히 모의하여 그 나라를 빼앗아 나누어 가자는 제안을 했을까.



〔 북사(北史)열전 / 地 豆 干 國 在 室 韋 西 千 餘 里. 多 牛, 羊, 出 名 馬, 皮 為 衣 服, 無 五 穀, 唯 食 肉 酪. : 지두간국은 실위(室韋) 서쪽 1천 여리에 있다. 소(牛). 양(羊)이 많으며, 이름난 말(馬)이 나오는데, 가죽은 의복으로 사용하며, 오곡(五穀)은 없고, 유일하게 먹는 것은 고기와 유즙(우유)이다.〕 - 이들은 이목(移牧) 및 유목(遊牧)종족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두간국(地 豆 干 國)”이 있었던 위치는 북사(北史) 열전(列傳)의 “오락후국(烏 洛 侯 國)”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곧,



〔 ➡烏 洛 侯 國 在 地 豆 干 北, 去 代 都 四 千 五 百 餘 里. 其 地 下 濕, 多 霧 氣 而 寒. (中略). 其 國 西 北 有 完 水, 東 北 流 合 於 難 水, 其 小 水, 皆 注 於 難, 東 入 海. 又 西 北 二 十 日 行, 有 于 巳 尼 大 水, 所 謂 北 海 也. 太 武 真 君 四 年 來 朝, 稱 其 國 西 北 有 魏 先 帝 舊 墟 石 室, 南 北 九 十 步, 東 西 四 十 步, 高 七 十 尺, 室 有 神 靈, 人 多 祈 請. 太 武 遣 中 書 侍 郎 李 敞 告 祭 焉, 刊 祝 文 於 石 室 之 壁 而 還. : 오락후국(烏 洛 侯 國)은 “지 두 간(地豆干)”국의 북쪽에 있으며, 대도(代都)에서 4,500 여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낮고 습하며, 안개기운이 많아 춥다. 그 나라의 서북(西北)에 “완수(完 水)”가 있어,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 水)” 와 합해지며, 작은 물은 모두 “난수(難水)”로 유입되어 “동해(東海)”로 들어간다. 또 서북(西北)쪽에 20일을 가면 “우 사 니 대 수(于 巳 尼 大 水)”가 있는데, 소위 “북해(北海)”이다. 태무제 진군(眞 君)4년에 래 조 (來朝)하였다. 이르기를, 그 나라의 서북(西北)에 위(魏)나라 선제(先帝)의 오래된 석실의 옛 터가 있다. 남북 90 보, 동서가 40 보이며, 높이가 70 척(尺)이다. 석실에 신령(神靈)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기원한다. 태무제가 중서시랑 “이 창(李 敞)”을 보내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석실의 벽에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다.〕



➡➡ 결국 북해(北海=澣海)지방에 “오 낙 후 국(烏 洛 侯 國)”이 있었고, 그 남쪽지방에 “지 두간(地豆干)”국이 있었다. 북해(北海)는 신강(新疆)의 북쪽 러시아 땅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 남쪽지방인 『러시아와 신강(新疆)사이』에 “지 두간(地豆干)”국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대도(代都)에서 4,500 리 떨어져 있다고 한 위 기록대로 서북방 4,500 여리면 바로 위에서 설명한 신강(新疆)의 북쪽 러시아 땅이다.



➡➡➡ 이러한 곳에 있던 “지 두간(地豆干)”국의 땅을 빼앗아 “연연(蠕蠕)과 고구려(高句驪)” 가 <나누어 갖자>고 비밀 회담을 하였다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가 이곳 가까이 곧 『신강(新疆)지방과 외몽골 최 서북쪽 지방에서 연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야 가능하다. 』는 점이다.



※ 고구려(高句驪)가 『반도 북방이나 하 북 성쯤에 있었다. 』고 한다면 대륙에서 기록된 역사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이며,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 논자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일천 수 백 년 전(一千 數百 年 前』에 동북공정이 아닌 “서북공정(西北工程)”의 프로젝트가 가동되어 반도 북방이나 하 북 성쯤에 있었다던 고구려(高句驪) 땅을 수 천리 서쪽과 서북쪽 지방으로 이동(移動)시켰다는 말인가? 이건 해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척 발(拓跋)”씨에 관한 것이다. “오 낙 후 국(烏 洛 侯 國)”의 서북쪽에 북위(北魏)를 창건한 태무제(太武帝)의 선조 왕이 있었던 곳(石室)이 북해(北海)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척 발(拓跋)씨들의 활동거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북사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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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1 < 資治通鑒 / 引用 / 大磧 >



※ 이 지방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자치통감(資治通鑒) 현종(玄宗)편에 있다. <資治通鑒 / 卷210 唐 紀 26/玄宗 / 先天元年>



〔辛 酉 ,沙 陀 金 山 遣 使 入 貢。沙 陀 者 ,處 月 之 別 種 也 ,姓 朱 邪 氏。▶處 月 居 金 娑 山 之 陽, 蒲 類 之 東, 有 大 磧, 名 沙 陀, 故 號 沙 陀. 〕



〔신유, 사타금산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사타(沙陀)는 처 월(處月)씨의 별종이며, 성(姓)은 “주사(朱 邪)”씨이다. ▶<처 월 씨>가 살고 있는 곳은 <금사 산>의 북(陽)쪽이며, <포 류 해의 동쪽>이며, 『대적(大磧)』이 있는데, 이름은 “사타(沙陀)”이며, 옛 부터 호칭하기를 “사타”라 하였다. ;


蒲 類 海 (포 류 해) : 〔在新疆鎭西縣西北.唐人亦名婆悉海.今名巴爾庫勒泊.後漢書.竇固傳;竇固擊呼衍王.迫至蒲類海.곧 신강 진 서 현 서북에 있다. 당인들이 또 부르기를 “파실 호”라 하고, 지금의 이름은 “파 이 고 륵 박”이다. 후한서 “두고”열전에 “두 고(竇 固)”가 호연 왕을 치고 추격하여 포 류 해에 이르렀다. 〕하였다. 이곳 지방은,



1) 포 류 국(蒲 類 國) ; 신강(新疆)의 “진 서 현” 서북에 있었으며, 한나라 때의 서역국이다. 천산(天山)의 소유 곡(疏 楡 谷)에서 다스렸다. 후한(後漢)시절에 그 왕이 흉노에게 죄를 지어 옮겨갔는데 6천여 구(口)였다. 內地(내지)는 흉노의 우부(右部) “아 악 지【阿 惡 地 : 사람이 살기 힘든 조건을 가진 아주 험한 언덕의 땅】”다. 또 <號阿惡國.故地爲移支國所居.西域圖考云,今爲巴里坤地.巴爾庫勒淖爾.卽蒲類海也.又有蒲類後國在其西北.> 그 나라는 “아악 국”으로 불렸으며, 옛 땅에는 “이지 국”사람들이 살았다. “서역도고”에 따르면 지금의 “파 리 곤”의 땅이다. “파 이 고 륵 뇨” 가 곧 “포 류 해”이다. 또 “포 류 해 후 국”은 그 서북에 있다.



2) 이곳 주위에 천산(天山=白山)이 있으며, 남쪽에 이오(伊 吾)가, 동쪽엔 알타이산맥이 있으며, 서쪽에는 선선과 토 노번이 있다.



3) 이곳 “포 류 해”의 동쪽이 바로 대적(大磧)지대라 하며, 적(磧)이란 “사타(沙陀)”를 말하며 “비탈진 모래사막”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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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磧(적)>은 沙陀(사타)이며, 沙陀(사타)는 “비탈진 모래언덕”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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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 異 曰: 薛 居 正 五 代 史 後 唐 太 祖 紀 曰: 太 祖 姓 朱 邪 氏 ,始 祖 拔 野 古 ,貞 觀 中 為 墨 離 軍 使。太 宗 平 薛 延 陀 ,分 同 羅、僕 骨 之 人 ,置 沙 陀 都 督 府 ,蓋 北 庭 有 磧 曰 沙 陀 ,因 以 名 焉永 徽 中 ,以 拔 野 古 為 都 督。其 後 子 孫 五 世 相 承 ,曾 祖 盡 忠 ,貞 元 中 繼 為 沙 陀 府 都 督。 <沙陀 : 비탈진 사막 : 천산북로의 준 가 루 분지?



< 고이 왈 ; 설 거정의 "오 대사" 후당 태조 기에서 이르기를, 태조의 성씨는 “주 사”씨이다. 시조는 “발 야고”이다. 정관 중에 “묵리군사”이다. 태종이 설연타를 평정하여 동라, 복골 인을 나누어 사타도독부를 설치하였다. 북정(北庭)에 적(磧)이 있는데 이르기를 “사타(沙陀)”라 하며, 이것으로 인하여 이름이 되었다. ‘영 휘’ 중 ‘발 야고’는 도독이 되었으며, 그 후 손 5세를 계속 계승하고 증조 진충에 이르러, ‘정원’ 중에 ‘사타 부 도독’을 이었다.>



※ 적(磧)지방이 사타(沙陀)이다. 沙陀 란 포 류 해 동쪽의 <비탈진 모래 언덕>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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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 陽 修 五 代 史 記 曰李 氏 之 先蓋 出 於 西 突 厥 ,本 號 朱 邪 ,至 其 後 世 ,別 自 號 曰 沙 陀 ,而 以 朱 邪 為 姓 ,拔 野 古 為 始 祖 。 其 自 序 云『沙 陀 者 ,北 庭 之 磧 也。當 唐 太 宗 時 ,破 西 突 厥 諸 部 ,分 同 羅、僕 骨 之 人 於 此 ,置 沙 陀 府 ,而 以 其 始 祖 拔 野 古 為 都 督 ,且 傳 子 孫 數 世 ,皆 為 沙 陀 都 督 ,故 其 後 世 因 自 號 沙 陀。』 然 予 考 于 傳 記 ,其 說 皆 非 也。夷 狄 無 姓 氏 ,朱 邪 ,部 族 之 號 耳。拔 野 古 與 朱 邪 同 時 人 ,非 其 始 祖 ,而 唐 太 宗 時 未 嘗 有 沙 陀 府 也。



<구양수 오 대사 기(記)에서 이르기를 ; “이씨”의 선조는 서돌궐에서 나왔다. 본 호는 “주사”이며, 그 후세에 스스로 호칭해 이르기를 “사타”라 하였으며, “주사”를 성(姓)으로 하였고, 발 야고는 시조다. 그 스스로 “사타 사람은 북정(北庭)의 적(磧)이다”라 하였다. 당시 당 태종이 서돌궐을 칠 때 동라, 복골 인들이 나누어져 이곳 “적(磧)”에서 사타 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그 시조 “발 야고”는 도독이 되었으며, 마땅히 자손으로 전해져 수세대에 이르렀다. 모두 사타 도독이었으며, 옛 부터 후세에 이로 인해 “사타”라 호칭하였다. “연자고”의 전기에는, 그 설은 모두 틀리다. 이적(夷狄)은 모두 성씨가 없다. 주사(朱 邪)는 부족의 호이며, 발 야고는 ‘주사’와 같은 시기의 사람이다. 그는 시조가 아니다. (중략).



唐 太 宗 破 西 突 厥 ,分 其 諸 部 置 十 三 州 ,以 同 羅 為 龜 林 都 督 府 ,僕 骨 為 金 微 都 督 府 ,拔 野 古 為 幽 陵 都 督 府 ,未 嘗 有 沙 陀 府 也。當 是 時 ,西 突 厥 有 鐵 勒、薛 延 陀、阿 史 那 之 類 為 最 大 ,其 別 部 有 同 羅、僕 骨、拔 野 古 等 以 十 數 ,蓋 其 小 者 也。 又 有 處 月、處 密 諸 部 ,又 其 小 者 也。 朱 邪 者 ,處 月 別 部 之 號 耳



<당 태종이 서돌궐을 파하여 제부를 나누어 13주를 설치했는데, 동라는 구림도독부로, 복골은 금 징 도독부로, 발 야고는 유릉도독부로 하였는데 사타 부는 아직 되지 않았다. 당 시기 서돌궐에는 철륵, 설연타, 아사나 등이 가장 컸으며, 그들의 별도 부로 동라, 복골, 발 야고 등의 십 수부가 있었으나 이들 모두는 소부락이었다. 또 “처 월, 처 밀”의 여러 부가 있었으나 이들은 조그만 부였다.>



太 宗 二 十 二 年 已 降 拔 野 古 ,其 明 年 ,阿 史 那 賀 魯 叛 ,至 高 宗 永 徽 二 年 ,處 月 朱 邪 孤 注 從 賀 魯 戰 于 牢 山 ,為 契 苾 何 力 所 敗 ,遂 沒 不 見。 後 百 五 六 十 年 ,當 憲 宗 時 ,有 朱 邪 盡 忠 及 子 執 宜 見 于 中 國 ,而 自 號 沙 陀 ,以 朱 邪 為 姓 矣。



<태종 22 년, 발 야고는 이미 항복하였고, 그 명년에 “아사나 하 노”가 반하여, 고종 영휘 2년에 이르렀는데, 처 월. 주사는 뇌산(牢 山)의 “아사나 하 노”와의 전쟁을 외롭게 따랐는데, “설 필 하력”이 패하자 몰하여 볼 수 없었다. 그 후 156년, 헌종 때 “주사진충”과 그 아들 “집의”를 중국에서 보았다. 스스로 “사타”라 하고 “주사”는 성씨라 하였다.>



蓋 沙 陀 者 大 磧 也 ,在 金 莎 山 之 陽 ,蒲 類 海 之 東 ,自 處 月 以 來 居 此 磧 ,號 沙 陀 突 厥。



<모든 “사타”는 “대적”이다. “금사 산”의 북쪽(陽)에 있으며, “포 류 해”의 동쪽이다. “처 월”이래로 “적(磧)”에 살았으며, 호칭하기를 “사타돌궐‘이라 하였다.



而 夷 狄 無 文 字 傳 記 ,朱 邪 又 微 不 足 錄 ,故 其 後 世 自 失 其 傳 ,至 盡 忠 孫 始 賜 姓 李 氏。李 氏 後 大 ,而 夷 狄 之 人 遂 以 沙 陀 為 貴 種 云。」今 從 之。



<이적은 문자, 전기(傳記)가 없어, 주사(朱 邪)도 기록이 부족하고, 옛 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실전(失傳)되어 “주사진충”때 으르기 까지 없어서, 처음으로 성씨를 내려 “이씨”로 하였다. 이씨(李 氏)는 후에 커졌는데, 이적(夷狄)인들은 “사타”를 귀한 혈통(가문)으로 전해져 지금 이에 따른다.>



<자치통감 및 통전 인용. 끝>



『磧』지방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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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❹-1-1적(磧)지방과 운 중(雲中)



※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명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통상적인 역사해설에서 『운 중 (雲 中)』은 현 산서 성 북방쯤에 있다고 하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鑒)의 기록에는 전혀 다른 지방 곧 서역(西域)지방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를 보자.



資治通鑒 / 卷201 / 唐 紀 十 七/ 高 宗 / 龍 朔 三 年 (663年)



【 二 月 ,徙 燕 然 都 護 府 於 回 紇 ,更 名 瀚 海 都 護; 徙 故 瀚 海 都 護 於 雲 中 古 城 ,更 名 雲 中 都 護。以 磧 為 境 ,磧 北 州 府 皆 隸 瀚 海 ,磧 南 隸 雲 中。



〔 2 월, 연연도호부(燕 然 都 護 府)를 회흘(回紇)로 옮기고, 한해도호(瀚 海 都護)라 이름을 바꿨다. 옛 한해도호(瀚 海 都 護)는 운 중(雲 中)의 옛 성(城)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운 중 도호”라 했다. 『적(磧)』지경은 “적 북(磧 北)의 주(州)와 부(府)는 모두 한해도호(瀚 海 都護)에 예속되고, 적남(磧 南)은 모두 운 중(雲 中)에 예속되었다. 〕



資治通鑒 / 卷193 唐 紀 九 /太 宗 / 貞 觀 四 年



〔<西 突 厥 種 落 散 在 伊 吾> 伊 吾 ,即 漢 伊 吾 盧 之 地 ,在 大 磧 外 ,東 至 陽 關 二 千 七 百 三 十 里。是 年 置 伊 吾 縣 及 伊 州、伊 吾 郡 於 其 地。<詔 以 涼 州 都 督 李 大 亮 為 西 北 道 安 撫 大 使 ,於 磧 口 貯 糧> ➡此 磧 ,即 伊 吾 東 之 磧.



〔 서돌궐(西 突厥)의 종족들이 떨어져 흩어졌는데 “이오(伊吾)” 에 있다. 【 注 1 : 伊吾(이오)는 한(漢)의 이오 노(伊吾盧)의 땅이다. 대적(大磧)의 밖에 있으며, 동쪽으로 양관(陽關)까지 2,730리에 이른다. 시년(是 年)에 이오 현(伊吾 縣)과 이주(伊州)를 설치했는데, 이오군(伊吾 郡)의 그 땅이다.】조서(詔書)를 내려 량 주 도독(涼 州 都 督) “이 대량(李 大 亮)”을 “서북 도 안무대사(西 北 道 安 撫 大 使)”로 하고, 적구(磧 口)에 양식을 저축토록 하였다. 【 注 : 이 “적(磧)”지방은 곧 이로(伊吾) 동쪽의 “磧(적)”이다.】



※ 위 문장에서 【 注 1 : 伊吾(이오)는 한(漢)의 이오 노(伊吾盧)의 땅이다. 대적(大磧)의 밖에 있으며, 동쪽으로 양관(陽關)까지 2,730리에 이른다. 시년(是 年)에 이오 현(伊吾 縣)과 이주(伊州)를 설치했는데, 이오군(伊吾 郡)의 그 땅이다.】라는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이오(伊吾)에서 양관(陽關)은 남(南)쪽 지방이지 동(東)쪽지방일 수 없는 지리, 지형적 관계다.


이오(伊吾)에서 동쪽으로 2,730 리 떨어진 곳에 “양관(陽關)”이 있었다고 하면, “이오(伊俉)”는 현 신강(新疆)의 남쪽지방인 타클라마칸 사막지대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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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1 의 『포 류 해(蒲類海) 동쪽의 사타(沙陀)가 곧 적(磧)지방이며, 대적(大磧)지대 』라는 기록과 ❹-1-1의 『 적(磧)지방은 이오(伊吾)의 동쪽 』 이라는 기록에서 두 곳은 같은 곳일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천산산맥의 북쪽 『이오(伊吾)와 포 류 해(蒲類海)』는 남북(南北)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이곳의 동쪽 사막(砂漠)지대를 “적(磧)”지대라 하며, 사타(沙陀)라 하며, 모래언덕이란 뜻이다. 적(磧)지방 중에서 특히 “대적(大磧)”은 포 류 해(蒲類海) 동쪽지방이다. 이곳은 또 다른 이름으로 “적중”【磧中 : 적(磧)지방의 한 가운데】이라 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 적 북(磧北). 적남(磧南). 적서(磧西)』라는 대칭되는 지명의 대명사도 생겨날 수 있었고,



그러나 “적동(磧東)”이란 말은 없다. 이것은 포 류 해(蒲類海)의 동쪽 500-700 리에 “알타이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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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못잡아먹어 안달인 일본도 수긍하는 내용인데
지금껏 사학계를 쥐고흔드는 관학파에선 도저히 인정을 못하나 봅니다
하긴 학도병 모집을 한 이병도를 민족사학자라고 하는 부류들이니 ㅎㅎ



 


추천 역사 홈페이지
하나가라 우리나라 http://blog.daum.net/nero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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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경 2011-12-28 16: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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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개인적으로 한마디 의견도 없이 퍼다 나른 게시물은 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라구~~

조영석 2011-12-28 16:20:10
답글

김원룡은 뭐하는 사람인가요? 이 사람은 종중인가요?

최정현 2011-12-28 16: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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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경님 게시물에 제글이 섞이긴했는데 제가봐도 단순펌글로 보일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br />
제 생각해대해 글을 추가해 봤습니다^^

최정현 2011-12-28 16: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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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님 친일매국노 이병도 휘하의 관학파라고 불리는 사학자들이 종종 저럽니다<br />

양호석 2011-12-28 16:26:19
답글

까칠하시기는.. 국토대왕 선조도 자랑스럽지만 우선당장 조국통일 못하는것도 선조들할테 부끄러운 일이입니다..

최정현 2011-12-28 16: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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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애들조차 일부 인정하는 내용인데 한국에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다고 합니다<br />
역사인식이 미천해서는 통일도 요원한 일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남두호 2011-12-28 16:53:23
답글

어제 이어 '충격'이란 제목이 좀 과장적이란 느낌입니다..<br />
거의 대부분 아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만.. <br />
TV를 통해서도 여러범 방영 된 적도 있고요..<br />
단편적인 프로는 기억이 안 나지만 <br />
대규모 기획 프로그램은 2000년도 초에 '아 고구려'인가 하는 제목으로 <br />
TV에서 규모있게 제작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br />
<br />
그 이후로 각종 사극에서 고구려나, 고대 역사를

정현철 2011-12-28 16:56:07
답글

뭐 까마득한 옛날 얘기 해서 뭣 하겠습니까..<br />
<br />
지금 형세를 보면 북한은 중국에 편입될 겁니다. 앞으로 중국이 세계1위가 될 것이기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수가 없어요. 미국은 점점 약해지고 중국은 강해지고.....<br />
통일은 이제 물건너 갔다봐야지요. <br />
<br />
김대중 전대통령이 그렇게 평화 정책을 추구한 것도 김정일 사후 이런 것까지 다 내다 보고 한 건데,<br />
당장 코앞밖에 보

정현철 2011-12-28 1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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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 돌아가는 걸 보면 실질적으로 전쟁 위험은 거의 사라졌고, 이젠 거의 종전 됐다 봐도 무방하지요. 한반도 전쟁은 이제 한국, 북한의 의지를 떠나 있습니다. 북한놈들이 아무리 전쟁 일으키고 싶어도 중국,러시아가 허락하지 않으면 전쟁 못하구요. 반대로 전쟁 하기 싫어도 중국이 원하면 전쟁해야 되는 처지,,<br />
한반도에서 전쟁 날려면 미국이 북한 공격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확률 높은데 그 공격에는 중국에 대한 견제가 들어있지요 그

박재현 2011-12-28 17: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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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북경은 중원인들의 근거지가 아니네요....명나라의 수도가 되기 이전에 <br />
<br />
금나라의 대도시였었고....원나라의 수도였죠...<br />
<br />
주로 북방 민족이 개발한 도시였습니다.<br />
<br />
중원인들은 장안, 낙양 , 개봉...남경...요런 가운데 지방이 주무대였구요...<br />
<br />
지금의 북경 근처가 고구려의 영향권이라고 해도 별로 놀랄일은 아닙니다.

varuna21kr@yahoo.co.kr 2011-12-28 18: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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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에서 주장하던 내용이죠

이동옥 2011-12-28 19: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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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이니 반도사관이니.. 비판받는 분들은 대부분 실증사관을 갖고 있는 분들입니다. 실증사관이란 역사학에서 해석의 영역과 사실 확인의 영역이 있는데 사실 확인이 해석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관점입니다.<br />
<br />
이분들은 사실로 믿을만한 증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학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관점을 견지합니다. 따라서 일부 문헌이나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그걱이 마음에 드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br />

이동옥 2011-12-28 19:28:37
답글

이분들은 자신들을 식민사관이라 매도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강변합나다. '아직 우리의 한국사 관련 연구 성과는 일제시대 일본의 성과보다도 적다. 예를들어 조선왕조실록을 일본은 식민지배 후 17년만에 일본어로 변역했지만 우리는 50년 걸렸다.. 따라서 일본이 주장하는 사실을 반박할만한 증거가 부족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br />
<br />
그러나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런 부분들은 모두 우리의 주장을 입중할만한 증거를 갖게 될 것

이동옥 2011-12-28 19:35:50
답글

한 국가에서 통용되는 정설이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br />
<br />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의 무서움은 그들의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국가적 차원에서 찾고있다는 점입니다. 가치중립적인 타국의 역사학자들은 증거를 중심으로 각자의 주장에 대해 판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br />
<br />
국 내

이동옥 2011-12-28 19:46:52
답글

상대국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접근을 봉쇄한 채 진행된 연구 결과물이 학술연구의 결과물로 인정벋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br />
<br />
이는 연구의 성과물로 안정받기 위해 필요한 정차적 실증성이 부족하는 주장이지요..<br />
<br />
이런 세계에 수 많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유적 하나.. 문헌 몇 개.. 그중에서도 위작이라 의심할만한 상당한 가능성을 가진 문헌을 포함해서.. 이것이 있으니 우리는 고구려 영토가 북경까지 였다고

이동옥 2011-12-28 19: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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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족을 달자면..<br />
<br />
식민사관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분에게 고대사 수업을 들었습니다. 일본이 암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칠지도입니다. 칠지도에는 명문이 있는데 몇 글자가 지워져 있습니다. 하필 지워진 부분ㅈ중 하나가 칠지도를 만들어 알본왕에게 하사한 것인지 공물로 바친것인지 적힌 부분입니다.<br />
<br />
일본은 다른 증거들을 들면서 바친 것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하사한 것이라 주

이재진 2011-12-28 20:50:36
답글

다 좋지만, 중국 일본이 꼭 증거가 있어서 우기는 건 아니잖습니까. 대충 갖다 끼워 맞춰서라도 우기는데, 우리는 있는거도 증거 부족 어쩌고 하면서 우리조차 부정하니 연구를 누가 더 하겠냐고요

문재현 2011-12-28 21: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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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빠진 사학자들이 많답니다<br />
먹고 살자니 그 사학자 제자나 조교들은 믿고 따라줘야하니<br />
감히 다르다고 반박을 할수가 없답니다<br />
반박 하면 그쪽 업계 에서는 매장 된답니다

motors70@yahoo.co.kr 2011-12-28 22: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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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저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 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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