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즐겨찾기추가
로그인 회원가입 | 아이디찾기 | 비밀번호찾기 | 장바구니 모바일모드
홈으로 와싸다닷컴 일반 상세보기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요즘으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문제는 심리야. - 밑의 글에 대한 답중의 하나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11-12-15 22:42:49
추천수 3
조회수   623

제목

문제는 심리야. - 밑의 글에 대한 답중의 하나

글쓴이

윤은선 [가입일자 : ]
내용
Related Link: http://www.ddanzi.com/news/39710.html

읽어볼 만한 글이라고 생각되어 퍼왔습니다.

가급적 링크를 클릭하시는 것이 이해가 쉽습니다(시각효과).



모든 사람들이 문사철의 단어와 텍스트에 친숙한 것은 아니잖아요.

더구나 인간의 인지과정은 내 밥벌이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핵심 키워드들로만 건너뛰면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되죠.



-------------------------------------------------------------------------



연대의 필수교양 - Stroop과 Heuristic





라면을 많이 끓여본 사람은 안다. 배고파 죽겠는데 물이 졸라 안 끓는 기분. 미동도 없어 보이는 냄비 속 물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미묘한 일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지랑이 같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의 결. 그리고는 작은 공기방울들이 냄비 바닥과 벽면에 자리 잡는다.



뒤이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소리를 낸다. 기계음 처럼 들리기도 하는 소음. 그 소리가 잠잠해짐과 동시에 물은 끓고 우리는 라면과 스프를 넣는다.



오세후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안철수의 등장을 보고 총수는 주장했다. 역대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될 거라고. 총수는 그 때 발견했던 것 같다. 미묘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대류를.



그리고 이제, 곽노현 구속수사, 박원순 당선, FTA 날치기, 한겨울의 물대포 등등, 한국의 구석구석에 공기방울들이 툭툭 터져나온다.



이걸 보고 이제는 나꼼수 죽이기가 본격화된다. TV토론회에서 <나꼼수 이대로 좋은가>를 놓고 토론을 한다. 정봉주가 깔대기 한번만 대면 각종 매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학생들이나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나꼼수 이대로 좋은지 대화가 시작되면 분위기가 살벌하다.



이제 들려올, 물 끓기 직전의 시끄러운 소리는, 예전의 정치권의 갈등, 권력과 권력의 갈등 수준이 아닐거다. 개개인이 서로서로 싸운다. 100분토론에서 눈꼴사납게 서로 덤벼들듯, 이제는 술자리에서, 담배피는 자리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살벌한 교전이 오간다.



계층과 계층, 가치관과 가치관 사이의 맞짱.



이건 아마도 전체 국민이 자신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참여하는 거대한 힘 겨루기가 아닐까 싶다.









전국민의 전국민에 대한 힘겨루기











질문 하나 한다. 예전엔 평소 정치에는 조또 관심 한 톨도 없던 사람들 앞에서 최근 들어 정치 얘기를 하면 반응이 어떠한가. 대표적인 예상 답변은 이렇다.





1. 나꼼수 듣고 인간이 바뀌었다. 가카 소식을 나보다 먼저 안다.



2. ㅆㅂ 나꼼수 안듣고 정치에 무관심하면 병신이냐며 졸라 짜증을 낸다.



3. 그대로다. 귀닫고 멍하니 있다.





내 주변은 확실히 1,2번이 압도적이다. 3번은 별로 없다. 그냥 성급하게 일반화를 해보자. 다들 그렇다고. 다들 정치에 관심이 많아지거나, 오히려 탈정치성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졌다고. 계속해서 멍하니 있는 사람의 비중이 줄고 있다.



노장사상의 무위(無爲)를 서술할 때 위무위(爲無爲)라고 쓴다고 한다. 즉,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무위가 아니라 <무위를 한다>는 소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액션인 거다. 그처럼 탈정치도 이제는 정치적 성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탈정치적 정치 성향>이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트위터라는 매체 덕분에, 수면위로 올라오기 어려웠던 개개인의 사고나 성향 변화가 이제는 가시적인 데이터 및 미디어로써 그 외형을 드러내고 있다. 조중동이 그래서 쫀 거 아니겠나. 대중들 눈 가리고 지들 말만 믿게 만들어왔었는데 그 눈가리개 속으로 자꾸 뭐가 들어와서 보여버리는데. 신뢰도나 정통성 따위는 둘째 치고, 눈가리개 밖에 뭔가 있다는 걸 아는 그 자체가 무서운 거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의 정치적 변화는 연쇄적으로 그 변화를 촉진시킨다. 성향이 변한 사람, 성향을 지키고 싶은 사람, 성향을 계속 안 갖고 싶은 사람, 성향이 바뀌는 게 무서운 사람, 성향이 바뀐 게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의 성향도 바꾸고 싶은 사람 등등.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늘어가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보수언론의 설레발 덕분에 원래 그 방법이 뭔지 몰랐을 사람들 까지 그 방법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만나는> 상황.











글은 대중들의 욕망을 낳고, 대중들의 욕망은 지옥문을 연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온이 본다면 그가 말한 그 지옥 자체일게다.







단적인 예로, 평생 내가 맑스 책을 보던, 회사를 때려치던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시던 울 어머니가 최근 딴지스로 활동하는걸 어떻게 아시고는 대뜸 물어보신다.



"우리 아들 좌파여?"



요즘의 시국이 그런거다. 평생 정치는 신경도 안 쓰고 사시던 분이 뭔가 시끌시끌한 요즘 분위기가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신 거다. 그래서 평생 처음으로 아들래미의 정치적 성향이 신경이 쓰이신 거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면 이제부터는 단순히 어떤 정당과 어떤 정당간의 싸움이라던가 한 정당 내의 어떤 후보와 어떤 후보 간의 싸움이 아니다. 전 국민의 전 국민에 대한 갈등과 힘겨루기다. 당장 나는 내년 총선과 대선이 아니라 울 어머니의 정치적 성향과 힘겨루기를 해야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나라당이나 현정권과 싸우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우리편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의 힘겨루기를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훨씬 어렵다. 중단하기도 어렵고 도망가기도 어려우며 무엇보다도, 명분을 만들기가 어렵다.



약자가 불합리한 강자와 싸우는건 그 자체로 명분이 된다. 하지만 내가 울 어머니를 설득시키는건 내 정치관이 완벽하지 않고서야, 유교적 관점의 가치관 부터 주변의 시선까지, 고려해야할 게 너무 많다.



내가 검찰과 싸우다가 졸라 잘 싸워서, 검사들이 거품 물고 쓰러지면 난 그냥 이긴 거지만 울 어머니랑 싸우다가 어머니가 거품 물고 쓰러지시면, 난 그냥 천하의 씨발놈 되는 거니까.









스트룹 효과 (Stroop Effect)















위 글씨를 읽어보자. 뭔가 생경한 느낌이 드시나. 평소 안쓰던 손으로 딸칠 때와 유사한 미묘한 이질감.



스트룹 효과는, 인지심리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개념인데, 위 글씨처럼 어떤 기호의 외형과 그 기호의 의미가 서로 상충될 때 발생하는 버벅거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빨간색으로 쓴 <빨강>과 빨간색으로 쓴 <파랑>은 인지적인 용이성이 다르다. 외형과 의미가 일치할 수록 인지하기 쉽다. 그리고, 이 효과를 만들어내는, 서로 생경하게 매칭된 자극을 <스트룹 과제>라고 한다.



그러면 조금 더 응용해보자.







사과 참외 오이



사과 참외 오이







어떠신가. 위와 아래 중 굳이 조금이라도 더 읽기 편한걸 고른다면, 위쪽이 미묘하게 편하고, 아래쪽이 미묘하게 낯설다.



저런 식으로 새빨간 사과는, 홍옥보다 부사와 아오리를 주로 먹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노란색 글씨 보다는 빨간색 글씨가 아주 조금이나마 더 편하다.



실제로 이정도 응용 실험은 많이 있었고, 결과는 예상대로다. 빨간색으로 쓴 사과가, 노란색으로 쓴 사과보다 인지처리 속도가 더 빠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이유를 생각해보면 서구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실물보다는 그림책이나 만화 등을 통한 교육이 많고 마케팅적인 이유로 글씨 색깔을 그 글씨의 의미와 유사하게 맞추는 일이 많기 때문에 더 익숙해서라고 볼 수 있는데 이걸 인지심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인간이 어떤 개념을 저장할 때, 각 개념들간의 인접성을 가정할 수 있다. 엄마-아빠는 자주 함께 사용되므로 두 개념을 서로 인접하게 저장한다. 하지만 엄마-배타적경제수역은 동시에 쓸 일이 졸라 없기 때문에 인접하게 저장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인접성을 <거리>개념으로 비교를 하곤 한다. 이러한 개념간 <거리>라는건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보통 <연상작용>이라고 한다.



자, 이 단어의 순서를 외운다고 해보자.



개 - 고양이 - 나비 - 꽃 - 뱀 - 아담 - 이브 - 크리스마스 - 산타 - 코카콜라



몇 분 안에 외울 수 있을거다. 일반적인 현대인이라면. 그런데 이 순서를 한 번 외워보자.



나비 - 크리스마스 - 꽃 - 아담 - 개 - 코카콜라 - 고양이 - 산타 - 뱀 - 이브



씨바 필자가 쓰면서도 졸라 헷갈린다. 이건 그냥 쌩으로 외워야하기 때문에

암기력이 유달리 좋지 않고서야 좀 집중을 해서 맘 먹고 외워야 한다. 서로 개념적으로 인접할 수록, 거리가 가까울 수록 인지하기가 편하다는거다. 이쯤에서 좀 더 응용해보자.





박근혜 노회찬



박근혜 노회찬





이번엔 어떠신가. 정말 미묘하다. 사실상 위 아래간 친숙함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어느 한쪽이 우세하진 않다. 하지만 정말 아주 미세하게 미묘한 뭔가가 있다. 뭐 없다고 우기면 할말 없지만 필자는 정말 졸라 아주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고 본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저렇게 졸라 미묘한 거까지도 차이를 느낀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인간이 인지 과정에서 얼마나 귀찮은 걸 싫어하는가, 거리가 서로 먼 개념을 연결시키는걸 얼마나 귀찮아하는가에 대한 증거다.







인지적 구두쇠와 휴리스틱(Heuristic)













일전에 딴지 기사에서 인용된 바 있는 인지적 구두쇠 개념. 위에서 말했듯, 인간은 개념간 거리를 처리하는 데에 졸라 민감하고, 결과에 별 차이가 없다면 인지처리 해야 할 거리를 단축시키려 한다고 풀어볼 수 있다.



그 <거리의 단축>을 위해 인간들이 습관적으로 보이는 사고 및 행동 패턴을 <휴리스틱>이라고 부른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예가, 비행기와 자동차의 안전성 비교. 비행기 공포증이란건 분명 존재한다. 비행기 사고가 무서워서 비행기를 못 타는 사람. 반대로 차가 무서워서 차를 못 타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고 한층 병신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비행기 사고로 인한 사망률보다 훨씬 높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상당수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묘하게 비행기 사고가 더 무섭다는 인상을 지닌다.



그 이유는, 비행기 사고가 훨씬 더 레어한 사고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더 크게 다뤄진다는 점과, 그 희소성 때문에 기억에 더 잘 남는다는 것. 기억에 잘 남는다는건 다시 말하면 생각이 잘 난다는 거다. 이러한 사고 패턴을 <가용성 휴리스틱>이라고 한다.



또 이런 것도 있다. 당신이 슈스케 심사위원인데 흑인 한명과 몽고인 한명이 있다. 노래를 시켰는데 둘 다 노래를 씨바 졸라 못한다.



어느쪽이 더 의외일까. 흑인과 몽고인 중에서.



흑인이라 노래를 잘 할 것 같은 느낌. 그게 선입견인 줄 알지만 막상 반대되는 예를 볼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의외성. <대표성 휴리스틱>의 예이다.



이 휴리스틱이라는 개념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은 매사 하나하나에 미주알고주알 따지는게 졸라 귀찮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덜 따지고 싶어한다는 거다.



필자가 심리학 개념을 거론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한번만 더 하자. 스트룹 효과, 휴리스틱 얘기를 한 의도는 뭘까. 단 하나다. <지극히 정상>이라는 거다.



미주알 고주알 다 안 따지고, 그냥 생각하기 쉬운 대로 생각하는 사고패턴.

그 사고과정에서 파생되는 행동. 이건 다 지극히 졸라 정상이다. 옳고 그른 걸 떠나서, 절대적으로 많은 인간들이 절대적으로 자주 보이는 양태라는 점.



우리가 싸워야할 상대도, 힘겨루기를 해야 할 상대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이렇게 살고 있는거다. 최대한 덜 생각하고, 덜 따져가면서.







전국민의 팀 구분

















김용민 교수의 <보수를 팝니다>에서는 보수를 모태보수, 기회주의보수, 무지몽매보수로 나누고 있다. 필자는 이 구분에 매우 동의하고 시기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위 구분은 김교수가 책에서 밝혔듯이, 보수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를 기준으로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각자의 <욕망>을 기준으로 했다는 말이다.



욕망. 졸라 중요한 키워드다.



일단 보수에 대한 구분은 김용민 교수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진보를 한번 나눠보자.





1) 이성진보



맑시즘을 필두로 한 근현대 진보 사상을 이론적으로 접하고 사상적, 이념적, 학술적으로 경도된 경우. 맑시즘을 학문적으로 접한 경우 자주 발생한다. 이들은 경제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진보 이론의 프레임이 논리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내용상으로는 급진적이다.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맑스의 꼬뮤니즘은 정반합 중 정과 합에 해당하므로 근본적으로 절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치적 타협이라던가 중도적 해결이 졸라 불편하다.



반면, 이성진보의 상당수는 교육수준이 높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노동자계층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의 욕망은 사회구조의 혁명. 본인의 이성적 유토피아의 실현이다.





2) 감성진보



감성진보는 기본적으로 <분노>에서 시작된다.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 부자에 대한 분노, 상급자에 대한 분노, 구조에 대한 분노 등. 본인의 삶, 혹은 본인 주변인의 삶에서 직접적인 분노를 쌓아온 경우도 있겠고, 용산참사, 두리반 등의 사건에서 간접적으로 분노를 느낀 경우도 있다.



이들은 행동력이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감정은 이성보다 훨씬 직접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행동력에 비해 사상적, 이념적으로는 온건한 경우가 많다.



상징적인 예로,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아동노동착취 기업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시위나 불매운동을 한다 해도 그들에게 <분쇄> 같은 단어는 별로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역사적 유물론이나 노동자혁명은 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진보와 갈등하기 쉽다. 이성진보가 보기에 감성진보는 어리석은 선동가들이고, 감성진보가 보기에 이성진보는 뜬구름 잡는 입진보, 비겁자처럼 보인다. 감성진보의 욕망은 <저 새끼들의 패배>, <우리의 승리>다. 말하자면 일종의 복수이다.





3) 생활진보



생활진보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진보이론이 옳다고 느낀 경우이다. 그리 많지 않은 경우인데, 이들은 이념적으로나 행동력 측면에서나 급진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내 삶이, 내 가족들의 삶이 걸려있으니까. 그들의 욕망은 <지금보다 나은 나와 내 가족의 삶>이다.



아주 정밀한 구분은 아니지만, 이렇게 보수는 모태보수/기회주의보수/무지몽매보수로, 진보는 이성진보/감성진보/생활진보로 구성된다. 이제 하나 남았다. 중도. 무당파. 탈정치파. 등등. 중간에 있는 사람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냥 무지몽매보수에 넣어도 무방하다. 이들은 게으르거나, 기회가 없었거나, 고민중이라는 이유로 정치성향을 정하지 못했거나 거절했다.



이들을 그냥 무지몽매보수에 넣어도 되는 이유는, 실제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적 침묵은 무지몽매보수의 정치적 활동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이들의 욕망은 똑같이 <먹고사니즘>이다.



자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무지몽매보수와 중도/무당파의 상당수, 그리고 생활진보는 욕망이 서로 같거나 유사하다. 나 자신의 더 나은 삶. 먹고사니즘. 내가 더 잘사는 사회. 이들은 일련의 과정에서 학습하거나 경험한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편에 있을 뿐.



목적은 같다. 나의 삶.



뭐, 기타 등등으로 아예 계열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겠다. 사이비종교신봉자, 급진적 힌두교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등. 이런 사람들은 일단 재끼겠다.







그들의 전략

















맑스적 계급론을 기반으로 할 때 모태보수와 기회주의보수는 대다수가 브루주아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나머지는 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즉, 실제 대결구도는 맑스의 대결구도와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편이어야 할 인간들이 저쪽편에 가 있다는 소리. 그래서 <무지몽매>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만큼, 모태보수 및 기회주의보수가 달콤하게 유혹을 한거다. 초선에게 유혹을 받은 여포를 마냥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무지몽매보수를 포섭한 건 정치구조적으로 당연하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구조 상에서는 지지기반이라는게 필요하다. 다른 말로 대가리수를 채워야한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 혹은 이득을 위해 자신들을 지지해줄 다수의 시민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사실 신자유주의, 재벌위주의 경제정책, 개방적 무역협상 등은 무지몽매 보수의 대다수를 궁핍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분명 졸라 치밀하고 효과적인 전략이 있다.



그 전략의 상당수는, 일반적인 인간 전반이 지니고 있는 심리학적 특성, 인지적 구두쇠, 휴리스틱을 근간에 둔다. 자, 스트룹 효과를 한번 더 응용해보자.









임을 위한 행진곡



친구야 친구



-----------------------





임을 위한 행진곡





친구야 친구









위쪽의 매칭과 아래쪽의 매칭. 어느쪽이 더 쉽게 인지되시는가. 물론 차이는 진짜 졸라 없다시피 할 정도로 미묘하다.



하지만 질문을 <어느 쪽이 필자가 '쉬운 쪽'으로 가정한 매칭인가>로 바꾼다면 딴지스 전원이 답을 맞출 것이다. 그 얘기가 이미,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는 얘기 되겠다. 아래쪽이 더 쉽게 인지되는 거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근데 생각해보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김일성이랑 뭔 상관이 있냐. 친북/주체사상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씨바 졸라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상관이 조금은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최소한 '친구야 친구'라는 노래보다는 훨씬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 - 북한 - 공산주의 - 진보 - 운동권 - 임을 위한 행진곡



이라는 연상작용 때문.



이론적으로 북한은 공산주의랑 졸라 상관이 없고, 요즘 세상에 한 운동권 대학생이 북한 넘어가서 '어머니 여기도 조국입니다' 이딴 소리 할 리도 없는데 아직도 우리는 저런 인식을 갖는다.



이건 마치, 사과가 진짜 새빨간 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먹는 사과는 노란색 부분이 졸라 넓은데도 불구하고 빨간 글씨로 쓰여있는 사과라는 글씨가 더 빨리 인지되는 것과 같다. 또는, 싼타가 먹는 콜라는 펩시보다 코카콜라일 확률이 졸라 훨씬 높아보이는 것과 같다.



계속된 노출과 반복주입으로, 서로 꽤나 거리가 멀어야 할 개념들을 가까이 둔다. 마치 소련이 공산주의였던 거처럼 보이도록, (실제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였다. 맑스의 꼬뮤니즘에는 그도록 강력한 국가가 없다.) 시위를 하는 대학생은 친북인 거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이런 것들은 내 삶을 위협하는 것처럼.



이러한 시각에서, 무지몽매 보수들이 지니고 있는 대표성 휴리스틱들을 돌이켜보면 <진보적인 무언가>는 죄다 <나를 위협하는 것>으로 매칭돼있다. 하다 못해 <아침이슬>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보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



즉, 한마디로 정리하면 상대방(진보)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공포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수십 년 간 졸라 차곡차곡 쌓여왔기 때문에, 국민들 전반에 집단 무의식과 컴플렉스를 구성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지몽매보수와 생활진보는 겁나 먼 심리적, 정치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기본원칙

















이렇게 첨예한 전략 속에서 나꼼수는 무지몽매 보수의 상당수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건 말하자면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와 유사한 방식이다.



바나나 껍질은 노랗다. 하지만 속살은 희다. 매일유업은 이 점을 토대로 오히려 약간 생경한 그 느낌을 마케팅에 활용했다.하얀 우유 같은데 바나나우유래. 아 맞다. 바나나 속살은 하얗지. 라는 과정을 통해 더 오래 기억에 남게 하고 싶었던 것. 뭐 결론적으로 대성공은 못했다.











흰색 바나나우유는 일종의 스트룹 과제다. 인지하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특별함을 만든다. 게다가 흰색과 바나나의 개념간 매칭이 이성적으로 말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감을 준다.



만약에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가, 빙그레 바나나우유를 이기고 전국민의 바나나우유가 됐다면 이후에 나오는 모든 바나나우유는 하얗게 나올거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면, 그 때는 노란색 바나나우유가 스트룹 과제가 된다.



나꼼수는 그걸 해낸 셈이다.



진보는 위험하다. 진보는 북한을 좋아한다. 진보는 우리의 삶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인지회로와 무관하게, 재밌고, 웃기고, 내 삶을 대변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게다가 들어보니 졸라 맞는 소리다. 신뢰성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이 구도가 확장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번 주말에 소개팅에 나간다고 치자. 소개팅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사실 맑스주의자에요"





평균적으로, 이건 나가리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저 박원순 찍었어요." 이거 나가린가? 아니다. 아마 대답이 이렇게 올 확률이 좀 더 높다. "꼼수 들으세요?" 오히려 상대방이 "아... 저는 나경원 찍었는데"라거나 "아... 저는 그날 일이 있어서..."라고 한다면 도리어 그쪽이 더 부끄러워할거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나꼼수가 깨놓은 인지회로의 성과만으로도, 진보적 개념의 키워드들이 <위험함>이라는 개념과 졸라 거리가 멀어졌다는 거다.

오히려 다소 긍정적인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고, 그 대상을 넓혀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특정 조건의 스트룹 과제는 기존의 인지적 거리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 특정 조건이란 이렇다. 지금은 생경한 이 자극이, 사실은 나의 인지적 수고를 훨씬 덜어주리라는 확신을 줘야한다.



바나나우유와는 달리, 하얀색 치즈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뒀다. 왜. 우유는 진짜 하얗거덩. 바나나는 껍질이라도 노랗지, 우유는 진짜 흰데 치즈가 주황빛일 이유가 없다. 처음엔 분명 생경한데, 이게 졸라 맞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거다.



그리고 중요한건, 그게 확실히 <몸에 더 좋을 거>라는 사실이 단박에 이해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치즈-주황빛이라는 인지적 거리를 유지하면 나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거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스럽더라도 치즈-흰색이라는 새로운 거리관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



그러면 나꼼수는?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단순한 친북좌파적 식견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나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씹쌔끼들이 나를 졸라 위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다. 그것도 졸라 재밌게.



결국, 상대방의 <욕망>에 더 근접해야 한다는 점이다. 먹고사니즘이 최우선인 그들.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잘 살고 싶은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스탠스가 오히려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써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물. 끓다.













필자가 대학시절에 항상 주장하던 <김부장론>이라는 개똥철학 이론이 있었다. 자수성가해서 연봉 9천 받는 대기업 김부장은 브루주아냐, 프롤레타리아냐, 라는 질문.



졸라 씨바 프롤레타리아다. 왜. 그는 일을 해서 돈을 번다. 브루주아는 일을 안하고, 돈으로 돈을 번다. 이게 핵심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노동을 통해 돈을 번다. 그걸로 먹고 산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모태보수와 기회주의보수가 될 수 없다. 기회주의보수가 됐다면, 그는 이미 노동자에서 브루주아로 전입했거나, 전입 예정인 사람이다.



즉, 일해서 돈 받고 먹고사는 인간이 보수라면, 그는 원칙적으로 무지몽매 보수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니라고 생각할거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필요하고, 과하지 않은 복지와, 적은 소득세가 필요하다고.



근데 씨바 이 생각은 못하겠지. 세금 덜내고 좀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당신이 착취당하는 삶과 가치는. 주말도 없이, 매일같이 룸싸롱가고, 정치싸움하고, 새벽에도 일터지면 달려나가는 근면함으로 인해 망가지고 있는 당신의 인간적 가치는. 그리고 그걸 쪽쪽 빨아먹는 기회주의보수와 모태보수들은.



위에서 말했듯, 무지몽매보수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구조 하에서 보수에게 필수적인 자산이다. 그게 없으면, 보수는 무너진다. 쿠데타나 불법을 제외하고는 권력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이 힘을 겨뤄야할 상대는 무지몽매 보수에 해당하는 다수의 대중이다. 그들을 우리편으로 끌어오지 못한다면, 그들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린다면 희망은 사라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당신의 삶은, 그런 식으로는 나아지지 않는다는 확신.



나꼼수의 인기 비결이, 가카로 인해 피폐해진 국민들에 대한 위로라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건 위로라기 보다는 사실 확인이다. 그 사실 확인을 위해 나꼼수 4인방은 쉽고, 웃기고, 재밌고, 감동적인 방법론을 차근차근 쌓아나간 거다.



이제는 나꼼수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전국민의 전국민에 대한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이제 시끄러운 소음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고 그 힘겨루기가 끝나면 물은 끓는다.



왠놈들이 커피 타먹지 못하게 배고픈 우리가 그 끓는 물을 쟁취해서 라면을 끓여먹을지어다.







추천스크랩소스보기 목록
조한욱 2011-12-16 04:31:22
답글

명쾌하네요.

장준영 2011-12-16 05:01:04
답글

웬만한 교수들 함량 미달 소논문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 정도 각도와 명쾌성, 구체성은 있어야 내용 있는 글이라 할 수 있지…

  • 광고문의 결제관련문의